보름 후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옥새를 거머쥔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이 미국 정치 및 국제 정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겠지만, 국제 정세가 종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패턴과 리듬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12월 29일 퇴임을 앞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전격 추방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러시아 정부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고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와 클린턴 후보 선거참모의 컴퓨터 서버를 해킹한 '사이버 공격' 사실이 미국 정보기관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러시아 외교부도 발끈해서 이에 상응하는 보복조치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튿날 아침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맹국과 손잡고 국제 행동규범을 훼손하는 러시아의 행동을 저지할 것"이라며 푸틴 정부를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번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섰다. 그런데 의외로 '새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며’ 대응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날 오후 트럼프는 장단을 맞추듯 “매우 영리하다”는 문자를 트위터에 띄웠다.

해킹 논쟁을 둘러싸고 백악관을 떠날 대통령은 푸틴을 안보 위협으로 몰아세운 반면, 백악관에 새로 입성할 대통령은 푸틴을 정다운 친구처럼 대한 것이다. 정권 교체기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신구(新舊) 정권이 대 러시아 관계에서 이런 불협화음을 내는 것은 지난 70년 동안 없던 일이다.

해킹은 한국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일인데, 왜 정권 교체를 앞둔 미국에서 ‘사이버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뜨거운 정치 논쟁을 낳는 것일까. 그 이유는 미국 정보기관의 쌍두마차인 FBI(연방수사국)와 CIA(중앙정보국)에 의해 러시아 정부가 미국과 그 동맹국을 해칠 요량으로 은밀하고 치밀하게 펼치고 있는 사이버공격(cyber-attack)의 실체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계와 안보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사이버공격이 미국 정치 체제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국제 안보에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트럼프의 승리로 결말이 났지만, 작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유권자 득표수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후보가 앞섰으나 선거인단 확보에서 패배한 아슬아슬한 선거였다. 선거기간 중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트럼프에 호의적인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트럼프도 푸틴에 추파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겉으로 드러난 홍보전에 불과했다.

러시아 정부와 연결된 해커들은 2015년부터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존 포데스타 클린턴 선거대책본부장의 전산망을 해킹해 이메일 정보를 대량으로 빼냈다. 그 정보는 위키리크스를 통해 유포되었다. FBI가 해커를 추적한 결과, 그 근원지는 러시아 정부의 두 정보기관, 즉 연방보안국(FSB)과 군정보국(GRU)으로 확인됐다. FSB의 전신은 옛 소련 시대 악명 높은 KGB이며 푸틴은 그 동독 지부의 책임자 출신이다. 그리고 러시아 해커들은 미국에서 보안이 가장 잘된 백악관, 국무부, 합참(Joint Chief of Staffs)을 목표로 사이버 공격을 강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킹된 민주당 선거 관련 이메일 정보들은 위키리크스를 통해 유포되면서 막판 선거전에서 클린턴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겼고 트럼프는 상대적으로 덕을 봤다. 이 사이버 공격이 당락에 영향을 얼마나 끼쳤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푸틴이 원하는 대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 본부 해킹 사건은 미국 정계에서 민주주의와 안보 위협의 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미국 선거가 푸틴의 손바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정권을 잃은 민주당은 물론이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다수의 공화당 정치인들도 청문회 개최 등 러시아 사이버공격에 대응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미국인들은 45년 전 닉슨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민주당 전국 위원회(DNC) 침입 사건의 악몽을 떠올린다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해 닉슨 재선 팀이 민주당 건물에 침입한 국내 사건이었다면, 작년 민주당 본부 사이버공격은 미국선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러시아 푸틴 정권이 행한 주권 침해라는 관점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푸틴의 사이버공격이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 동맹국, 특히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도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격의 행태도 단순히 서버를 해킹해서 정보를 빼갈 뿐 아니라, 발전소 등 국가의 기반시설을 마비시키거나 선거전에 거짓정보를 유포해서 요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살펴보면, 러시아는 작년 사이버공격으로 우크라이나 내 3개 발전소를 마비시켜 30만 명에게 공급되는 전력을 일시에 중단하는 충격을 가했고, 리투아니아에서는 친미적인 대통령이 소련 유학 당시 소련첩보기관에서 일했다는 정보를 퍼뜨리는 수법을 사용했다.

사이버전쟁은 저비용 고효율이 특징이다. 값싸고 눈에 안 띄고 추적이 어려운 게 사이버 공격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밀리는 러시아는 미국과의 대결에서 사이버 공격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보고 오래전부터 사이버 전사(戰士)들을 훈련시켜 왔다. 미국도 사이버공격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가 한발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보스포럼의 창설자 클라우스 슈밥은 그의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서 “사이버전쟁은 현 시대 가장 심각한 위협 가운데 하나다. 어떤 상대도 적의 센서와 정보통신, 의사결정능력을 파괴하거나 교란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인, 공직자, 기업인, 학자들은 입만 열면 ‘4차 산업혁명’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 줄 장밋빛 미래와 화려한 기술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 소름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사이버 전쟁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나라를 통째로 사이버 공격에 노출시키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금 사이버 전쟁에 대한 초점은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건 미국과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남북한 대결과,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동북아에서 사이버 전쟁은 암암리에 진행 중인지 모른다. 한국은 사이버공격에 방어벽이 잘 설치된 나라일까. 아직도 국내 인사 사찰에 돈과 정력을 쏟는 한국 정보기관의 행태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며 걱정이 앞선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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