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침몰 3년여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23일 눈시울을 붉힌 것은 비단 미수습자 가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 20여 명을 구조해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불리는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씨(52)는 이날 세월호 인양 소식에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씨는 가슴팍에 달린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거듭 매만지며 "애써 뉴스를 안 보려고 하고 있다"고 했다. 세월호 소식을 접할 때마다 당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어서다.

그는 "인양을 더 빨리 했어야 했는데 사실상 너무 늦어졌다"면서도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고, 오히려 살아 있는 게 죄인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 부끄럽다"고 울먹였다.

그는 이어 "나와 같은 산증인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진상규명이 이뤄진 것도 의아하고, 대통령 탄핵 직후 세월호 인양이 빨리 추진되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며 "결국 그동안 국가가 짊어져야 할 짐을 우리 가족들이 다 짊어졌던 것 같다"고 한탄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공황장애 등 심한 트라우마를 겪어 왔다. 최근까지도 약 8개월간 서울권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다 이달 1일에야 제주에 내려와 일을 시작했다.

그는 "아직 몸이 온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세월호가 완전히 인양되면 팽목항을 찾아갈 생각"이라며 "그곳은 생계의 터전이었다. 미래가 사라진 나의 과거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끝으로 김씨는 미수습자 가족에 대한 위로와 함께 "세월호에는 304명(사망자 295명·미수습자 9명)과 함께 172명이 더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 달라"고 전했다.
 

앞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자신의 몸에 소방호스를 감고 학생들을 끌어올리는 등 세월호 침몰 직전까지 구조활동을 펼쳤던 김씨는 2016년 6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의상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바닷속에는 당시 침몰한 세월호에서 미처 구조되지 못한 단원고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인 3명 등 미수습자 9명이 잠들어 있다. 고(故) 조은화(2학년 1반)·허다윤양(2반)과 박영인(6반)·남현철군(6반), 양승진·고창석 교사, 일반인 권재근·권혁규 부자와 이영숙씨다.

미수습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고 권혁규군(당시 6세)은 아버지 고 권재근씨(미수습자)와 어머니 고 한윤지씨(희생자·베트남 출신), 한 살 터울 여동생 권지연양(생존자)과 제주 귀농을 위해 배에 올랐다 사고를 당했고, 고 이영숙씨는 제주에서 일자리를 얻은 후 본가가 있는 인천의 짐을 옮기려고 세월호에 몸을 실었다 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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