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용서하고 화합해야지.”

3일 4·3희생자추념식을 위해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4·3평화공원을 찾은 유족 양만수씨(69)는 행방불명인 묘역 앞에서 담담하게 아버지의 비석을 쳐다봤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하던 해 태어난 양씨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경찰들이 새벽녘 집에 쳐들어와서 잠자던 아버지를 화물차에 실어서 데려갔다. 왜 끌려갔는지도 모른다”며 “나중에 들어보니 죄를 저지를까봐 예비 검속된 것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눈물을 훔친 양씨는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는 너무 어려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아버지 형제 모두가 그때 끌려가서 총 세분의 비석이 여기(행방불명인 묘역)에 있다”고 말했다.

억울하게 가족을 세 명이나 잃었는데도 양씨는 “처음에는 국가를 원망도 많이 했지만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판단을 제대로 못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며 “이제는 용서하고 서로 화합하고 이해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예비검속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다는 고진선(74)·정자(68·여) 남매 역시 국가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으면서도 “국가추념일이 지정된 만큼 앞으로 좋은 대통령이 뽑혀서 슬픔이 가시지 않는 제주도민들을 잘 위로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4·3사건 발발 당시 12세였던 이화선씨(79·여)는 “큰오빠는 폭도로 매도돼 맞아서 앓다가 죽고, 작은오빠는 대전으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며 “집도 다 불태우고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어머니 홀로 두 아이 손을 잡고 다른 마을로 피난을 가셨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씨는 이어 “여기 행방불명인 묘역을 만들어 놓은 것도 결국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로할 방법은 없다”며 “국가는 너무 늦게 사과했고 배·보상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왜 4·3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국가 희생자에게는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4·3위패봉안소 안에서도 유족들이 저마다 헌화를 하며 기억 저편에 머물고 있는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행여 먼지가 앉을까 돌아가신 부모의 위패를 거듭 매만지던 정순자씨(77·여)는 위패 앞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떨궜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정씨는 “나는 7세, 내 동생은 4세 때 부모를 잃었다. 우리 아버지는 대동청년회 단장이라고 잡혀가 거문오름에서 십자가에 박혀 총살당했다”면서 “어떻게 사람을 산 채로(죽일 수가 있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정씨는 이어 “자식들 나이가 이제 여든이 다 돼 간다. 대체 언제쯤 배·보상이 이뤄질는지 모르겠다. 너무 늦은 것 아니냐”며 “4·3문제 해결에 있어 유족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자와 함께 위패봉안소를 찾은 한석문씨(77)는 “당시 21세 꽃다운 나이였던 우리 형님은 산에 올라가 숨었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 잡혀갔다”며 “이로 인해 우리 어머니가 경찰에 붙잡혀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한씨는 “매해 4·3평화공원, 대구형무소를 찾아 어머니와 형님의 넋을 기리고 있다”면서 “예전에는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기도 했었는데 사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앞으로 배·보상, 진상조사 등 남은 문제도 잘 해결되리라 믿는다”고 전했다.

6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유족들의 슬픔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4·3사건의 진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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