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안에 글씨를 찾아보세요.”

15일 오전 제주시 노형동 제주제일고등학교 내에 위치한 비석 앞이 초등학생들로 북적였다.

휴대용 스피커를 목에 걸고 마이크를 잡은 고영철 함덕초등학교 교장(60)은 40여명의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비석의 이름과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한 아이가 비석의 가장 윗부분을 매만지며 “여기 작은 글씨가 있어요”라고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아이의 손가락으로 쏠렸다. 작은 글씨로 ‘제주향교개수’라고 적혀 있었다.

고 교장은 “정면 윗부분에 작은 글씨만 있고 별다른 글귀가 적혀 있지 않은 이유는 글을 모르면 적혀 있어도 읽을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여 이 비를 권학비(勸學碑)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참여한 학부모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 교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 교장이 제주 향토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함덕초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향토사 탐방’을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현재까지 12번 진행했다.

고 교장은 “초등학교에서는 역사를 배울 기회도 적은데다 교과서에는 겉핥기식 교육이 주를 이룬다”며 “직접 현장을 다니면 살아있는 공부가 될 것 같아서 향토사 탐방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남녀 사이에도 알아야 사랑하게 되듯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도 알아야 애정을 갖게 된다”며 “나중에 크면 제주를 떠나는 아이들도 많을 텐데 고향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킬 때 이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학교 인근부터 시작한 향토사 탐방은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탐방에 참여한 김성주군(12)은 “교장선생님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비석이 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유심히 보니 글씨가 없는 이유도 알고 재밌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군의 어머니 이자은씨(43)는 “제주에 이주해왔는데 제주의 과거에 대해 공부하고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마련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다”는 고 교장은 1977년 교편을 잡은 뒤 틈날 때마다 제주향토유산을 찾아 나섰고 꼭 알아야 할 문화유산에는 제자들의 손을 잡고 갔다.

고 교장은 “1995년 삼달초에서 근무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역사기행을 갔는데 당시에는 재정적인 지원이 없어서 학부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열한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위해 내 차와 학부모 한분의 차를 끌고 돌아다닌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20여 년 전만 해도 자유롭게 현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켰는데 이제 그러기에는 제약이 많이 따르는 게 사실”이라며 “현장을 기반으로 한 교육이 더욱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고 교장은 그동안 정리한 2000여개의 제주 향토문화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고영철의 역사교실’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향토사와 현장체험 위주의 학습을 지도해 교육부장관상까지 받은 바 있는 고 교장의 열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년 퇴직을 앞두고 있는 고 교장은 “요새 퇴직 이후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는데 역사탐방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라며 “책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발로 뛰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늘 현장에서 제주의 문화유산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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