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기관 역할 규정 없고 유효신분증 해석도 제각각
손놓은 경찰에 보안취약 우려…법 정비 필요 한목소리

#1. 제주로 수학여행을 온 한 학생은 부상을 당해 먼저 타 지방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숙소에 학생증을 두고 오는 바람에 탑승을 거부당했다. 인솔교사가 본인의 교원확인증을 제시하며 신분 증명에 나섰는데도 항공사 직원이 학생증이나 학교장이 발행한 신분확인증명서류를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2. 대구에 가기 위해 제주공항을 찾은 20대 남성은 중학생 동생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주민등록등본을 제시했지만 ‘부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됐다. 이들 남매는 주민센터에서 청소년증 발급 신청서를 받아온 뒤에야 탑승이 허락됐지만 이미 비행기는 놓친 상태였다.

#3. 최근 한 부부는 어린 자녀에 대한 신분 증명서류를 놓고 제주공항과 여수공항의 해석이 달라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 부부는 “제주공항에서는 사본을 인정해 항공기 탑승을 하도록 해줬는데 왜 여수공항에서는 이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4. 제주공항 3층 출입장 앞에서 신분 확인 작업을 하던 한 직원은 ‘재외제주도민증’을 제시한 이용객을 앞에 두고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국토부는 국가항공보안계획상에서 제주도가 발행한 도민증을 유효 신분증으로 인정했지만 정작 도민증 뒷면에는 ‘신분증의 용도로 사용하실 수 없다’고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선 탑승객에 대한 경찰의 신원 확인 업무가 중단된 지 한 달째에 접어들면서 제주공항을 비롯한 전국 공항 곳곳에서 이 같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허용 가능한 신분증을 놓고 관계기관 간에 해석과 적용이 엇갈리는 것은 물론 공항공사 자체에서도 지역별로 신분증 허용을 놓고 혼란이 일고 있어 명확한 법적 정비가 요구되고 있다.

◇ 빈틈 많은 국가항공보안계획…이용객들 불편
 

국토부와 한국공항공사는 신분증을 도난·분실하거나 미지참한 이들에 대한 신분 확인이 어려워짐에 따라 주민등록등·초본으로 탑승을 허용해주던 기존 방식을 없애는 대신 유효 신분증 종류를 확대했다.

기존에는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제시해야만 보호구역 진입이 가능했으나 사진이 부착된 국가기술자격증과 제주도민증 등도 신분증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국가항공보안계획’을 개정한 것이다.

신분증이 없을 경우 주민센터에서 발급받은 임시신분증(주민등록증 발급신청 확인서)을 제출해야 하지만 주말이나 공휴일, 야간에는 행정 공백이 생겨 발이 묶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용객들의 편의를 고려했다는 게 국토교통부의 설명이다.

국토부는 주민등록등·초본만으로 탑승이 허용되지 않게 됨에 따라 초등학생이나 중·고교생에 대해서도 신분 허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문제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마련한 방편이 오히려 혼선을 더욱 초래하고 있다는데 있다.

경찰청의 업무 중단 통보 이후 급작스럽게 지침을 개정하면서 관계기관 간에 충분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개정된 국가항공보안계획상에서는 제주도가 발행한 ‘재외제주도민증’을 신분증으로 허용할 수 있도록 했으나, 제주도는 도민증을 신분증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못 박아 놓은 상태여서 두 기관 간에 지침이 상충되고 있다.

청소년의 경우 기존에는 학생증이나 청소년증이 없어도 등·초본이 있으면 인터뷰 등을 거쳐 탑승이 허용됐으나, 이제는 등·초본이나 학교장 신분 확인증명서류를 가져오더라도 부모나 인솔교사가 동반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탑승이 불가하게 됐다.

이로 인해 성인인 가족과 함께 왔는데도 부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탑승을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생겼고, 인솔교사가 본인의 교원확인증을 제시하며 다친 학생을 비행기에 태우려 해도 학생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신분증명서류의 경우 원본·사본에 대한 명시가 돼 있지 않다보니 공항마다 해석이 달라 발이 묶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분 확인 주체인 공항공사와 항공사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하고 싶지만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항공보안법)상 국토항공보안계획을 어기면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더욱이 홀로그램이 없는 국가기술자격증 등으로까지 허용 범위가 확대되면서 위조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어 공항 보안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에서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 항공보안법에 관계기관 역할 명문화 필요
 

제주지방항공청에 따르면 신분증 미소지자 국내선 탑승 불가 정책이 시행된 7월1일부터 25일 현재까지 신분증 없이 제주공항을 찾은 이들은 하루 평균 50명꼴로 집계됐다.

대부분 제주를 찾은 타 지역 이용객들이 주를 이뤘으며 많게는 106명까지 신분증 분실·도난 등을 호소하고, 주민센터가 문을 열지 않은 주말(23일)에는 80여 명가량이 제주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기존에 하루 평균 신분증 미소지자가 300명을 웃돌았던 것에 비하면 확연히 줄어든 수치지만 이들의 불편을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어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2001년 항공보안법상 경찰이 갖고 있던 공항 보안검색 감독권이 한국공항공사로 넘어갔는데도 경찰이 신분증 미지참자에 대한 신원 확인 업무를 해줬던 이유는 경찰 전산망을 통해서만 신원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편의를 위해 해당 업무를 유지해오던 경찰은 잘못된 관행을 없애겠다며 업무 중단을 통보했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은 오롯이 국토부와 공항공사의 몫이 됐다.

그런데 항공보안법을 들여다보면 사실 공항공사도 테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보안검색 의무만 있을 뿐 신분확인을 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민간항공사가 탑승객의 성명 등 운송정보를 파악해 공항공사에 제공하도록 돼 있다.

국토부가 별도로 수립한 국가항공보안계획상에는 공항공사와 항공사의 신분확인 업무가 기재돼 있지만, 상위 개념인 항공보안법상에 각 기관의 역할이 뚜렷이 명시돼 있지 않다보니 오락가락 혼선만 빚어지고 있다.

무사증 제도로 인해 밀입국 통로로 악용되는 제주공항의 경우 신분 확인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경찰이 이 작업에서 빠져버리면서 이용객 불편 초래는 물론 공항 보안까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철저하게 관계기관 간의 역할을 구축하기는커녕 위조가 용이한 신분증으로까지 허용 범위를 넓히면서 실효성 있는 항공보안법 구축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한국공항공사 관계자는 “항공보안법도 아니고 국가항공보안계획만으로 신분을 확인한다는 게 꺼림칙한 게 사실”이라며 “현장의 사례를 수렴해서 정부 차원에서 근원적인 문제 해결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지방항공청 관계자는 “제주의 경우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항경찰대 역할을 축소시키면 오히려 보안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용객들의 불편을 해소하려다 간과한 부분들이 많은데 탑승허용 범위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더불어 보안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도 동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공항공사는 26일 공항 이용객이 많은 제주·김포·김해공항 관계자들을 소집해 그동안의 문제점을 취합한 뒤 앞으로의 개선점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국가항공보안계획을 수정하는 차원이 아닌 항공보안법에 관계기관의 역할과 책임을 명시하는 내용으로 개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게 관련업계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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