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충씨, 2만3000마리 살처분에 거래처도 끊겨
8월부터 새로 병아리 키워 11월 AI 이후 첫 출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아파서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2만3000마리 모두 예방적 살처분 대상입니다."

지난 6월 한해 최대 성수기인 삼복을 앞두고 토종닭 납품 준비에 정신이 없던 조천병아리농장 대표 김학충씨(45)에게 청천병력같은 소식이었다.

김씨가 기르는 닭들은 AI(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검사에서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김씨의 양계장이 제주 AI사태의 발단이 된 군산 오골계를 도내 오일장에서 산 농가 반경 3㎞내에 있다는 이유로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됐다.

김씨는 "살처분은 사람이 할짓이 아니에요. 집사람은 실신해 쓰러졌습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입니다"라며 6월6일 살처분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우리 닭들은 병들지 않은 건강한 아무 죄없는 닭입니다. 살처분하려고 막사에 들어가니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우리 주인이 이 시간에 무슨일 일까'라는 듯이 바라보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올해 여름 가축전염병 청정지역 제주는 AI 농가 발생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충격에 빠졌다.

제주시 애월읍의 두 농가가 5월말 군산에서 사와 도내 오일장에 판 오골계 160마리에서 고병원성 AI가 검출된 것이다.

제주도는 공무원 수백명을 투입해 AI 발생 농가 등 4곳과 그 주변 반경 3㎞ 내 농가 34곳에서 총 14만5095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했다.

후유증은 컸다. 양계농가는 애지중지하며 기르던 가금류가 살처분되는 끔찍한 광경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려야했고 닭·오리 식당에는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

20년 전 아버지에게 농장을 물려받은 김씨는 2000년대 초반 전국에 AI가 창궐하자 제주도도 안전지대가 아닐수 있다고 판단, 자체 부화장을 만드는 등 나름의 대비를 했다.

김씨는 현대화 시설 등 농장 투자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HACCP(안전관리인증기준)까지 획득한 김씨는 우리 토종닭은 어디 내놔도 건강하고 맛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아내 박선숙씨(44)와 함께 농장을 꾸려갔다.

그런 그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피해는 살처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선 여름 장사를 망쳤다. 토종닭은 6~8월 3개월간 여름철 성수기 수입이 나머지 9개월과 맞먹는다.

닭들이 살처분되고 다시 병아리가 농가에 들어올 때까지 두 달간 김씨 부부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평소라면 닭 울음소리로 시끌벅적할 막사는 적막감이 흐를정도로 조용했고 먹다 남은 사료와 깃털만 나부꼈다.

"보상금 잘 받았으니 손 안대고 코 풀었다"는 식의 말들도 그들을 괴롭게 했다.

토종닭을 납품하기로 한 거래처인 식당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게 김씨 부부를 가장 괴롭게했다. 생닭이 없어 도계한 닭들을 식당에 대신 보냈지만 "맛이 예전같지 않다"는 손님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그러다보니 어쩔수 없이 김씨를 떠난 거래처도 생겼다.

김씨는 "처음에는 거래를 끊기로 하자 야속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다 생계때문인데 우리 입장에서도 똑같이 했을 수 있다고 이해가 됐어요.이제 다시 시작했으니 떠난 거래처들도 다시 돌아와달라고 부탁해야죠"라고 말했다.

힘이 돼주는 이들도 있었다. 김씨와 20년간 거래해온 한 식당 주인은 "내가 식당을 계속하는 한 김 사장 닭들을 쓸테니 힘내게. 어떻게 견디다 보면 다 지나가고 그때 또 웃으면 되지"라며 그를 위로했다.

김씨는 "본인도 식당이 안돼 힘들텐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고 더더욱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고 회상했다.

8월3일 김씨의 농가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살처분 이후 처음으로 병아리 4000마리가 입식한 것이다. 9월까지 김씨 농가에는 모두 1만2000마리의 병아리가 들어왔다.

토종닭은 납품할만큼 성장하려면 3개월 정도 걸린다. 8월 입식한 닭들은 11월쯤에는 출하할 수 있다. 김씨에게는 재기의 발판이 될 소중한 닭들이다. 추석 연휴도 닭들을 돌보며 지냈다.

새로 기른 토종닭이 있는 막사로 향하던 김씨가 키를 훌쩍 넘는 흙무더기 앞에 멈춰섰다. 살처분된 김씨의 닭 2만3000마리가 매장된 무덤이다. 김씨가 반드시 재기를 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내 무거운 표정을 짓던 김씨가 막사 안에 들어가 건강하게 자라 힘차게 울고 있는 토종닭들을 보자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김씨는 "다시는 AI가 제주에서 발생하지 않게 행정기관과 농가 모두 관리를 잘해 청정 제주의 명성을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 농가가 제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진출해 맛있는 닭고기라는 평가를 받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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