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공항 노숙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일부 항공사의 미숙한 대응이 기약 없는 노숙을 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

25일 낮 12시 제주공항 안, 사흘 만에 항공기 운항이 재개되자 체류객들은 집에 갈 생각에 들떠하면서 40여 시간 동안 쌓아왔던 속마음을 하나 둘씩 꺼내놓았다.

체류객 대부분은 이번 결항 사태가 빚어진 데 대해 '천재지변이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며 침착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 항공사 측의 미숙한 비상체계 등에 대해서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다만 제주도와 일부 도민들의 온정의 손길에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맨살을 맞댄 제주공항에 작별을 고했다.
▲ 결항 사태 해결 의지 없는 불통 항공사…“일단 기다리라”

“우리가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싶어서 했겠어요. 우리를 공항에 있을 수밖에 없도록 한 건 부족한 숙박시설이나 교통편이 아니라 항공사 측의 미숙한 일처리예요.”

“결항된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배정을 해주면 그만 아닌가요. 이미 예약 명단이 차 있는 상태에서 우릴 빈자리에 넣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대기표를 받아야 하는 거죠?”

A저비용항공사 발권 창구 앞에 카트를 세운 채 줄을 서 있던 윤모(45·여·서울)씨와 그의 남편은 “당초 운항 통제가 예고된 오후 8시보다 빨리 운항이 재개돼 다행”이라면서 “항공사의 미숙한 대처로 3일 내내 고생을 했더니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밤 9시5분 비행기로 김포에 갈 예정이었던 윤씨 부부는 “그날 A항공사는 결항됐다는 통보만 했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되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며 “승객들이 항의하자 다음날 새벽 기상 상태를 봐야 결정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성토했다.

윤씨 부부는 이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첫날엔 공항에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쪽잠을 자면서 이튿날 새벽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기상악화로 24일 낮 12시까지 활주로를 폐쇄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대기표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에 윤씨 부부를 비롯한 A항공사 승객들은 이날 오전 6시부터 발권 대기표 앞에서 차례대로 줄을 섰다. 이 대열에는 80대 할머니도 있었다.

하지만 A항공사 측이 “일단 기다려봐라. 환불을 원하는 사람은 환불해주겠다”고만 말하고 별다른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자 승객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혹시나 순번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대열을 떠나지 못했다.

대한항공 등 대형항공사는 항공권 수속 날짜를 기준으로 결항된 순서에 따라 승객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통보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다 다른 저가항공사들은 이날 오전부터 대기표를 나눠주는데 A항공사는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자 승객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윤씨는 “숙소라도 잡아서 쉬다 올 수 있게 대기표라도 달라고 요구했지만 항공사측은 대기표를 미리 줄 경우 뒤에 오는 이용객들과 싸움이 생길 수 있다는 황당한 말만 하더라”며 “아직까지도 항공사가 왜 대기표 발급을 미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승객들의 성화에 결국 A항공사는 이날 밤 9~10시에 이르러서야 대기표를 나눠줬지만, 이미 어두워진 뒤라 숙소를 잡기도 막막한 상황이었다고 윤씨는 학을 떼며 말했다.

이날 오전 이미 대기표를 받은 타 항공사 승객들은 마음을 놓고 공항을 빠져 나갔지만, A항공사 승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공항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2박3일 만에 제주공항을 빠져나가게 된 윤씨는 “우리가 공항에서 밤을 지샐 수밖에 없던 이유는 숙박시설이나 교통편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결항시 항공사측에서 사태 수습에 대한 의지 없이 일처리를 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뒤편에 서 있던 이모(40·서울)씨도 윤씨 부부와 마찬가지로 “A항공사측의 미흡한 대처에 공항에 발이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씨는 이어 “저희야 둘이라서 서로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켰는데 혼자 온 사람들은 화장실도 못가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서 너무 안타까웠다”며 “승객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A항공사 승객은 전편 결항에도 불구하고 문자 통보조차 보내주지 않은 데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모(29·여)씨는 “비슷한 시간대 다른 항공편을 이용하려 했던 동료들은 출발 4시간 전에 문자를 받았는데 나는 아무런 문자도 받지 못했다”며 “아무리 저가항공사라도 이렇게 승객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 같은 불만에 대해 A항공사 측은 “운항이 재개되면서 바쁜 상황이다. 언론 담당이 따로 없어 바로 답변을 주기 어렵다”며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 "제주 4번 와서 3번째 결항인데 여전히 비상대책 없다"
아내와 함께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샌 김모(33)씨 또한 “제주에 4번 와 이번까지 3번이나 결항됐는데 여전히 제대로 된 비상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며 “기상 변수가 큰 제주에서 비상사태에 대비한 매뉴얼 마련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공항 체류객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숙박업소를 안내하고 교통편을 증설하는 등 비상대책을 추진해온 제주도 측은 “지난해부터 대기표 발급을 지양하고 결항된 순서대로 배정하도록 요청했지만 시스템 상에 어려움이 있어서 협의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 “폭설은 야속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제주”
항공사 측의 미흡한 일처리 등으로 인해 1000여명이 넘는 체류객이 2박3일간 노숙 아닌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각종 지원으로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며 감사 인사를 남기는 이들도 있었다.

23일부터 공항에 발이 묶였던 황모(59·인천)씨는 “첫날에는 우왕좌왕해서 카트 위에 앉아서 보냈지만 24일부터는 도에서 매트를 나눠주더라”며 “섬이라서 한 번에 대량으로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었을텐데 이 같은 배려를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황씨는 이어 “천재지변이라 항공사나 제주도의 잘못이 아닌데도 담요도 주고 물과 빵, 우유도 줬다”며 “타지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신경써준 제주도민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36명이나 되는 등산동호회 회원인 이모(55·여·대구)씨는 “제주도에서 체류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음을 써준 걸 알고 있다”며 “제대로 한라산에 올라보지도 않고 떠나지만 제주에서의 기억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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