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발이 묶인 체류객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방을 내어준 제주도민들의 민심이 한파를 녹이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마음이 물결처럼 번져 바다 건너편에서도 체류객들을 위해 방을 내주겠다는 이들이 나타나 훈훈함을 더했다.

하지만 체류객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무료 숙박’을 악용하는 사례가 일부 나타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 “택시 10만원에 분개…제주도민 민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제주공항 항공기 운항 폐쇄 이틀째인 24일 오후 제주지역 한 인터넷 카페에는 “공항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계신 분 저희 집에 오세요. 무료로 방 빌려 드리고 식사도 해드릴게요”라는 내용의 글이 게시됐다.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올리게 됐다는 배근호(66)·박민정(66·여)는 본인들이 사는 지역과 연락처까지 공개하며 “누구든 오셔서 편히 주무시고 가시라”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해당 카페에는 “우리집에 오세요”라는 댓글들로 도배되기 시작했고, 50여명에 이르는 회원들이 본인들의 거주지와 연락처를 남기며 체류객들을 초대했다.

같은 날 밤 9시에는 페이스북 제주패스 페이지에 ‘사랑의 민박’이라는 제목으로 “숙소가 동이 난 지금 여전히 숙소를 못 구하고 공항에서 노숙 중인 여행객들에게 무료민박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 게시물은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고 ‘사랑의 민박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제주패스 대표 윤형준(40)씨는 자신의 집 방 1칸과 동생 윤경필(38)씨 집을 통째로 내주었다.

윤 대표는 24~25일 수백통의 연락을 받았다. 70대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다 고립된 가족 9명, 상갓집에 문상을 왔다 발이 묶인 친인척 10명, 3살배기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 등 각각 사연도 다양했다.

윤 대표는 “너무 많은 방을 필요로 해서 감당이 안됐는데 SNS에 동참하겠다는 분들이 많아서 일일이 연결을 해드렸다”며 “도민들이 숙소를 공유하고 싶어도 중개를 해줄 마땅한 플랫폼이 없던 찰나에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이어 “사실 잘 아는 사람들한테도 집을 내보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70여명이 넘는 도민이 동참해줬다”며 “원룸에 사는 어떤 여자분은 방이 없으니 자신과 같이 자면 된다고 말해 혼자 온 여성관광객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최소한의 돈도 받지 않고 방을 내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윤 대표는 “체류객들을 상대로 택시비를 10만원이나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 마치 제주도 사람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비춰지는 게 억울했다”며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사랑의 민박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취지를 밝혔다.

▲ “정말 자도 돼요?…친척집에 온 것 같았다”
기꺼이 방을 내어주겠다는 소식이 인터넷카페, SNS,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지자 기다림에 지친 체류객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임신 6개월의 몸을 이끌고 태교여행을 떠나온 김모(31·여·서울)씨는 “몸이 무거워서 공항에서 기다리기가 힘들어 첫날에는 모텔에서 잤는데 이튿날도 또 결항되니 막막했다”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는데 흔쾌히 방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자신의 집을 선뜻 내준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마치 친척집에 온 것처럼 챙겨주셨다”며 “나중에 김포공항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 받은 도움을 나눠주고 싶다”고 밝혔다.

아들·남편과 함께 여행을 왔다 발이 묶인 김모(47·여·순천)씨는 “숙소 구하기가 힘들어서 카페에 방을 내주겠다고 올린 한 요양원에 연락했더니 흔쾌히 오라고 하셨다”며 “가는 길에 숙소가 구해지는 바람에 묵지는 않았지만 묵고 온 것만큼이나 감사하다”고 전했다.

26일 오후 2시, 제주공항 한쪽에서 친구 3명과 매트에 앉아있던 김모(27·서울)씨는 “23일 비행기가 결항돼 여기저기 숙소를 전전하다가 오늘에야 공항에 왔다”며 “SNS을 통해 무료 숙박 글을 보고 ‘와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 마음이 훈훈해졌다”고 말했다.
▲ 바다 건너서도 손길…일부 악용 사례 ‘씁쓸’
제주공항을 이용하지 못해 발이 묶인 사람들은 비단 제주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김포, 부산, 광주 등에서도 항공기가 뜨지 않아 제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방을 내어주겠다는 이도 있었다.

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제주 민심’ 기사를 접한 고금란(67·여·부산)씨는 “반대의 경우도 있겠네요. 제주도에 들어가야 하는데 못 가고 있는 분, 부산에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할테니 연락하세요”라는 내용으로 댓글을 달았다.

고씨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20여년 전 나도 제주공항에서 폭설로 인해 발이 묶인 적이 있었다. 공항에서 박스를 펼치고 무작정 기다렸다”며 “지금처럼 밤을 샐 정도는 아니었는데 10시간이 넘는 기다림에 입술이 부르트기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고씨는 이어 “남일 같지 않아 도와주고 싶던 찰나에 마침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댓글을 남겼다”며 “실제 도움으로 이어졌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전했다.

반면 숙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을 노려 체류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을 내어달라고 요구하는 등 좋은 취지를 퇴색시킨 이들도 있었다.

제주시 함덕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신산호(33)씨와 직원 이명우(35)씨는 ‘사랑의 민박 운동’에 동참해 30여명의 체류객을 수용했지만, 24일 저녁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비행기를 못 타서 공항에서 노숙을 하시는 분들을 오시라고 한 건데 그냥 놀러온 분들이 무료 숙박을 노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며 “그런 분들이 오셔서 주무시는 바람에 진짜 체류객들이 이용을 못할 뻔 했다”고 꼬집었다.

말실수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된 이씨는 “좋은 취지가 악용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면서 “체류객들이 묵고 간 방에 들어가보니 화장실이 막혀있고 정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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