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Ankor Wat)를 구경했다. 나에게 캄보디아는 갈 이유도 갈 마음도 없었던 곳이다. 캄보디아 하면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킬링필드’와 ‘지뢰밭’ 같은 나쁜 이미지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앙코르와트 유적군(遺蹟群)은 상상이나 사진첩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중국인 유럽인 등 동양과 서양의 관광객들이 골고루 섞여 득실거렸다.

국제공항이 있는 시엠립(Siem Reap)은 한국으로 치면 경주와 비슷한 곳 같다. 인구 35만 명의 도시로 앙코르와트 유적군을 볼 수 있는 거점 관광도시다. 그런데 시엠립에 머물며 앙코르와트를 구경하는 며칠 동안 내 의식을 휘어잡는 것이 있었다. 달러와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그곳에선 달러가 자유롭게 통용되었다. 오토바이에 카트를 매달아 놓은 ‘툭툭’이를 타고 유적지와 시내를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타고 다니면 요금이 15달러다. 운전기사들은 으레 달러를 주는 걸로 알았다. 유적지나 시내 할 것 없이 식당과 가게의 정가표에는 캄보이아 화폐인 ‘리알’ 단위가 아니라 달러로 가격이 표시되어 있었다. ‘코코넛 주스 1달러’, ‘모닝글로리(현지 메뉴) 5달러’ 등등.

캄보디아 화폐 ‘리엘’을 주고받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웬만한 나라에서 외국인이 물건을 사거나 밥을 먹을 때 환율을 환산하는 흔한 광경은 별로 없었다. 앙코르와트엔 중국인 관광객도 많았다. 단체 관광객이 식비를 달러로 지불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내 옆자리의 중국인 가족관광객 네댓 명은 음식 값을 달러로 지불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국의 영향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반면, 중국이 영향권이라 할 수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한가운데 있는 나라에서 달러가 통용된다는 것은 달러의 위력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 식당의 메뉴판과 가게의 가격표에 달러가 아니라 위안(元)화로 표시될 날이 머지않아 올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나라가 강해지면 그 나라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따라서 그 나라 돈(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건 깊은 경제지식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한국에 중국 돈을 들고 와서 관광지에서 별 불편 없이 쓴다. 서울 명동이나 제주도의 면세점이나 호텔에서 중국인들은 스스럼없이 위안화를 꺼내 쓴다. 사실 중국의 큰 도시나 심지어 북한 금강산에서도 행상들이 한국 돈을 받고 물건을 팔았던 건 경제력을 근간으로 한 한국의 국력과 통화제도에 대한 신뢰도 덕택인 것이다.

요즘 미국과 중국은 국제 정치 및 경제의 헤게모니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그 경쟁양상은 심해질 것이다. 모두 멸망하는 전쟁은 피하겠지만 부(富)를 놓고 벌이는 경제 전쟁은 오히려 치열해질 것이다.

21세기 들어 정치안정이 지속되며 중국은 과학기술뿐 아니라 기업경영 분야에서도 최대 시장을 바탕에 두고 두각을 보이고 있다. 세계의 돈이 중국으로 몰린다.

지금 세계 모든 국가는 아편전쟁이후 200년 가까이 잠자다 깨어난 중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주목하고 있다. 어떤 나라는 경이롭게, 어떤 나라는 우려하며, 또 어떤 나라는 겁먹은 채 중국의 ‘바디빌딩’을 지켜보고 있다. 한 국가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명목상 국내총생산(GDP)에서 중국은 11조 달러로 미국의 18조 달러에 뒤처져 있지만, 구매력 평가 기준(ppp)으로 계산한 GDP에서 중국은 21조 달러로 미국보다 크다. 2020년대 어느 시점 중국은 경제규모에서 세계 제일이 될 것이다.

아마 중국과 미국의 경제 각축전에서 맞게 될 최종 라운드는 기축통화 쟁탈전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중국은 미국이 모든 분야의 표준을 쥐고 주도하는 것을 놓아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달러가 독보적인 기축통화로서 국제사회의 모든 경제활동의 지불 및 결제수단이 되고, 가장 선호하는 보유화폐의 지위를 확고히 갖고 있는 것을 두고는 중국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어렵다. 중국은 달러의 지위를 흔들며 위안화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할 것이고, 미국은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지키려고 전력을 투구할 것이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미국의 쇠퇴 논쟁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여 ‘미국우선’을 내세우며 보호무역정책을 펴고,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고립주의로 가는 게 20세기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의 퇴조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미국은 점차 힘과 영향력을 잃고 달러화의 힘도 잃어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과 우려다.

그러나 이런 전망에 대한 반론은 강하다. 결정적인 시기에 의혹과 허점이 많은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 소망스러운 일은 아니나, 미국이 대통령 한 사람의 리더십 실패로 쇠락의 길로 들어설 허약한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기축통화와 보유화폐로서의 달러화의 위상에 큰 변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주류를 이룬다. 달러의 힘은 미국의 경제력과 국방력이 기초가 되는 하드파워뿐 아니라 미국의 문화, 금융시스템, 자유민주주의 사상 등 소프트파워까지 포함된 총체적 국력과 국가신뢰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쟁의 근저에는 중국이 단순한 경제력이 미국 경제력보다 커진다고 위안화가 기축통화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논지가 깔려 있다. 모건스탠리 투자 회사의 전략가 루셔 샤르마 같은 사람의 지적은 역사적 감각이 묻어난다. 미국이 경제력에서 영국을 넘어선 것은 19세기 말이지만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힘을 발휘한 것은 그로부터 50년 후인 2차 대전 이후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달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인 듯하다. 트럼프는 돈으로 일어나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과연 미국의 경제력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까먹을 것인가. 중국은 막강해지는 경제력을 통해 위안화의 지위를 어디까지 확대하려 할 것인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진핑이 운전대를 잡은 중국의 변화와 트럼프가 운전대를 잡은 미국의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기막힌 구경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앙코르와트의 호텔이나 가게 또는 툭툭 운전기사가 달러를 본체만체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그려진 위완화를 좋아하는 날이 언제 올 것인가.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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