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을 맞는 제주4·3희생자추념일을 2주 앞둔 20일 제주중앙고등학교에서는 특별한 수업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후 50년 만에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서 모교를 찾은 이중흥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71)이 강연에 나서는 날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은 그는 4·3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 반대운동이 일어났던 1948년 4월, 이씨 가족은 미군정과 경찰 등의 탄압을 피해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라산으로 몸을 숨겼다. 당시 이씨는 두 살배기에 불과했다.

어렵사리 피신 생활을 이어가던 이씨 가족은 이듬해 4월 토벌대가 헬리콥터에서 뿌린 전단을 보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정뜨르 비행장(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전단은 '산에서 내려 오면 살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씨 가족은 여지 없이 모두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얼마 후 풀려나긴 했지만 토벌대는 이씨의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씨는 "이 후 아버지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는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했고, 21살이 되던 해에는 제주시의 한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그러나 5개월 뒤 이씨는 직장을 나와야만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디 가셨느냐'는 상사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한 뒤 사흘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경찰 신원조회 과정에서 연좌제에 걸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정말 어렵게 들어간 곳이었고, 당시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며 "한 번은 아버지 제삿상을 발로 찬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일을 사죄드리지 못한 것이 평생의 후회"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씨는 50대 중반에 접어 들어 4·3의 진상규명과 수형인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고 그 배경을 전했다.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보관창고에서 발견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던 것이었다. 명부에는 이씨의 아버지가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표기돼 있었다.

이씨는 2000년 3월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를 창립했고, 이듬해 4·3희생자유족회와 통합된 뒤로는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4·3평화공원에 행방불명인 표석을 세우는 등 4·3 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서 왔다.

이씨는 "4·3은 우리 모두의 역사"라며 "4·3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현재 저를 포함한 유족들에게는 여전히 진상규명돼야 할 역사다. 여러분에게는 4·3이 어떤 역사로 기억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제 이야기로 70년 전의 4·3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가깝게 전달됐으면 좋겠다"며 "4·3을 통해 평화와 인권, 정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학생들이 돼 달라"고 당부하며 강연을 마쳤다.

강연을 들은 김규리양(16·여)은 "책으로만 접했던 제주4·3 이야기를 유족들의 목소리로 직접 듣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며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세대의 관심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채칠성 제주중앙고 교장은 "새 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며 "잘못된 것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알게 된 진실을 통해 화해·상생하며 평화와 인권의 시대를 열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한편 제주도교육청은 지난 12일 이씨를 비롯해 4·3 유족 37명을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위촉했다. 이들은 올 상반기 70개 학교에서 강연 등을 통해 4·3평화인권교육을 하게 된다. 이 같은 4·3 명예교사제는 올해로 4년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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