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제주4‧3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현재까지 추정된 희생자가 1만4000여 명, 유족 5만9000여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 비극이다. 희생자와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오명 때문에 피해 사실 조차 숨겨야했다. 뉴스1 제주본부는 아픈 과거를 딛고 화해와 인권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4‧3의 역사와 달라지는 인식 등을 3회에 걸쳐 보도한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떨 때 유일하게 따뜻한 말을 건네준 경찰이었어. 말 한 마디가 천만금보다 더 빛난다는 걸 알게 해준 분이시지.”

27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만난 4·3 생존자 오태경씨(88)는 7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고(故) 강계봉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꺼내놓았다.

오씨에 따르면 1948년 11월 22일 가시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무차별 발포와 방화를 한 뒤 생존자들을 표선리로 옮겨가도록 했다.

집을 잃은 주민들은 군과 경찰을 피해 표선면 곳곳으로 흩어졌고 이 중 160여 명은 표선국민학교에 감금된 채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갔다.

이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표선지서 순경으로 근무하던 강씨(당시 26)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출신인 강씨는 ‘폭도’로 지목받던 중산간 주민들에게 감자와 고구마 같은 식량과 땔감을 가져다줬고 여느 경찰들과 달리 반말도 하지 않았다.

동료 경찰이 주민들을 때리는 걸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지 않냐”면서 말리는 등 애꿎은 피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것도 어언 한 달이 됐을 무렵. 12월 22일 표선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주민들 중 가족이 없는 76명이 ‘도피자 가족’으로 찍혀 버들못 근처에서 한날한시 총살당했다.

이튿날에는 토산리 절간 창고에 수용돼 있던 100여 명 중 19명이 끌려가 해비치 모래판에서 총살당했다.

죽음을 막을 힘이 없던 강씨는 집단 학살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며 몸과 마음을 다독여줬다.

당시 18살이던 오씨는 키가 작아 나이를 속인 덕분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지만, 8살 터울인 형은 행방불명되고 형수는 전주형무소에 끌려가 징역형을 살아야만 했다.

오씨는 “그때 억울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는데 강 순경님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주민들에게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며 “폭도와 친하게 지내면 사상을 의심 받는 시절이었는데 일개 순경이 참 용감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이어 “폭풍이 휘몰아친 뒤 가시리에 돌아온 할머니들은 강 순경이 지나갈 때마다 삶은 계란을 하나씩 쥐어줬다”며 “지금은 계란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때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구좌파출소장까지 지낸 강씨는 고향 위미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다 2017년 7월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다.

뒤늦게 부고 소식을 듣게 됐다는 오씨는 “70년이 넘도록 제대로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보니 의인의 업적을 기리지도 못했다”며 “가시리 주민들이 마을에 강 순경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학살을 일삼던 경찰 중에도 강 순경님처럼 인간적인 경찰이 있었다”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던 그의 뜻을 본받아 이제는 누가 잘못했다 따지기 보다는 서로 화해하고 상생할 길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4·3 70주년을 맞아 학살 속 의인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힘쓴 독일인 쉰들러의 이름을 따 이른바 ‘제주판 쉰들러 리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4·3평화기념관에는 강계봉씨를 비롯해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김성홍 남원 신흥리장, 고희준 서청단원, 장성순 신흥리파견소 경사와 외도지서 방(方) 경사 등 7명이 ‘의로운 사람들(righteous people)’ 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김익렬 연대장은 4·3 초기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무장대 진영에 들어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담판을 벌인 인물로 유명하다. 이후 강경 진압작전을 거부하다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된 그는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4·3의 진상을 밝히는 유고록을 남겼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 사건 속에서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한 경찰관이다. 당시 그의 노력으로 성산지역 주민의 희생은 8명에 불과했다.

김성홍 신흥리장(당시 구장)은 주민 성향을 캐물어 학살의 근거로 삼았던 토벌대에 맞서 무조건 ‘모른다’로 일관, ‘몰라구장’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여졌다. 고희준 서청단원은 가혹 행위로 연일 비명이 그치지 않던 성산포에서 무고한 주민들의 살리기 위해 애쓴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방 경사’는 지서 주임의 총살 명령에 “총이 고장 나 발사되지 않는다”며 학살극을 피했다. 장성순 경사는 신흥리파견소에 부임했을 당시 “과거 일은 불문일에 부친다. 누가 어떻다는 말도 내게 하지 말라”며 무차별 학살극에 전전긍긍하던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최근에는 장시영 의사와 김순철 신촌파견소 순경 등 2명의 의인이 추가로 이름을 올렸다.

장시영 의사는 4·3발발 직전인 3월 조천지서에서 사망한 중학생 김용철군의 검시의사로 참가해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몰고 가는 경찰의 압박에도 ‘타박에 의한 뇌출혈’이라는 감정서를 제출, 고문치사 사건임을 밝혀낸 인물이다.

김순철 순경은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총을 발사하려 하자 “이들은 죄 없는 순한 사람들이다. 차라리 나를 쏘아라”고 온몸으로 맞서 대량 학살을 막아냈다.

양윤경 제주4·3유족회장은 “이들은 엄청난 비극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중시해 엄청난 용기를 내주신 분들”이라면서 “70주년을 맞아 화해·상생·평화·인권의 가치를 얘기하는 시점에서 의인들의 삶의 궤적을 쫓아 기억하고 태도를 배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기념관에는 없지만 알려지지 않은 의인들도 많이 계실 것이다. 앞으로 의인을 찾아 예우하는 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역할”이라며 “당시를 증언할 만한 분들이 연세가 많기 때문에 시간을 놓치면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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