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을 피해 고국을 탈출한 예멘인들이 제주로 대거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난민 정책이 기로에 섰다.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반면 잠재적 범죄자라고 우려하며 난민 수용을 거부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올라면서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지만 예멘들의 집단 난민 신청 움직임이 포착된 지 한 달이 넘도록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는 모양새다.

◇ 제주도에 책임 떠넘긴 법무부
유엔이 난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지정한 세계 난민의 날인 20일, 제주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체가 '예멘 난민 수용 문제'로 인해 들썩거리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1~5월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은 7737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 3337명에 비해 132%나 증가했다. 일평균 71명이 난민 신청을 한 꼴이다.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뒤 1994년 최초로 난민신청을 받은 우리나라는 난민법 시행 전인 2013년 6월까지 20년간 신청자가 총 5580명으로 연평균 약 280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3년 7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뒤 지난 5월까지 약 5년간 3만4890명‧연평균 6978명으로 늘어나게 됐고, 갈수록 난민신청자의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난민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 주된 원인은 '무사증 제도(비자 없이 30일간 체류)'를 이용해 제주를 찾은 예멘 난민신청자들이 지난해 42명에서 올들어 6월19일까지 549명으로 크게 늘어난 데 있다.

법무부는 예멘 난민신청자가 급증하자 4월30일부터 이들의 거주지를 제주로 제한(육지부 이동 금지)하고 6월1일부터는 무사증 입국 불허국에 예멘을 포함시켰다.

무사증 제도는 제주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 도입된 것이기 때문에 관광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외국인이 대거 입국하는 것은 본래 취지에 반한다는 이유에서다.

법무부는 "예멘 남‧북부 분리 이후 정치‧치안 불안 등으로 무사증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면서 "제주 무사증 제도로 발생한 문제를 제주 이외 지역에서 부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무사증'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이들이 '난민신청자'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 따르면 귀국하거나 타 지역으로 출도한 인원을 제외하고 현재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신청자는 486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12명은 18세 미만이다.

제주에 발이 묶인 이들은 언어‧종교적 인프라의 부재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도내 공원과 해변 등에서 노숙을 하는 상황까지 빚어지고 있다.

◇ "난민정책 생색내기식 안돼"

제주도는 5월 말 '예멘 난민 증가에 따른 유관부서 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제주출입국‧외국인청과 제주지방경찰청 등의 입만 바라보다 결국 회의를 무산시켰다.

난민법상 난민신청자 지원에 대한 판단이 법무부에 있기 때문에 지자체의 판단만으로는 섣불리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던 중 6월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난민신청자에 대한 보호는 선택이 아닌 국제사회와의 약속"이라며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과 '난민법'에 명시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예멘이 2015년 시작된 내전으로 현재 인구의 70%인 2000만명이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절박한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인권위의 요청 등을 고려해 지난 11일에야 난민신청자를 대상으로 도내 인력부족 업종에 취업을 허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원칙대로라면 난민 신청 이후 6개월간 취직이 불가능하지만 출입국관리법상 예외 규정을 적용해 취직을 허가한 것으로, 경제적 지원 대신 취업 연계를 통해 생계를 직접 꾸리도록 한다는 취지다.

난민법상 법무부가 난민신청자의 생계비‧주거시설을 지원할 수 있지만, 약 360여명이 생계비 지원을 신청했는데도 아직 심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난민 심사와 통역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난민신청자를 둘러싼 갈등과 거부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난민 인정 여부가 신속하고 타당하게 결정돼야 하지만, 미적지근한 행정 처리로 인해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꼴이 됐다.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난민협약국이지만 무늬만 인도주의 국가 행세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1994년부터 올해 5월까지 누적 난민신청자는 4만470명으로 이 중 절반 가량인 2만361명에 대한 심사가 종결됐으며, 839명이 난민을 인정받았다. 신청자의 2%만이 난민을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김성인 한국난민네트워크 제주예멘난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난민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쓴소리를 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우리 정부는 난민법 제정 이후 난민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 없지만 이제는 수면 위로 올려서 정책적 기조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며 "예산 부족으로 생계비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생색내기식 난민정책을 펼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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