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 '간첩'이라는 말이 제일 억울했는데 드디어…"

27일 제주시 일도2동 자택에서 만난 제주4·3 생존 수형인 박순석씨(91·여)는 고통스러운 지난날을 돌아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전날 정부로부터 제주4·3 희생자로 공식 인정받은 박씨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쏟아내며 71년 묵은 마음의 짐을 하나둘 내려 놓았다.

1928년 제주시 화북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박씨는 16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년여간 후쿠시마현의 한 소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만 해도 박씨는 간호사, 의사가 되려던 꿈 많은 소녀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아버지를 여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광복과 함께 제주로 돌아 온 박씨는 제주우체국 간부였던 지인의 추천으로 제주우체국 국제전화교환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대신 받아 통화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해 전달하는 일이었다. 당시 박씨는 20세였다.

일한 지 세 달쯤 지났을 무렵 박씨에게 걸려온 한 전화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친북단체인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의 전화였다.

발신자를 몰랐던 박씨는 통화내용 중 '조선'이라는 표현을 '한국'이 아닌 '조선'으로 번역했다. 일본인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해당 전화를 북한과의 교신으로 보고 박씨를 간첩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제주 전역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1948년 5·10선거)를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찰의 핍박이 심해지자 박씨는 어쩔 수 없이 산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소개령으로 산에서 내려오게 된 박씨는 이듬해 2월 군인들에게 붙잡혀 제주시 농업학교, 주정공장 등으로 끌려다녔다. 피신 당시 쌀 등의 식량을 보급하는 과정에 적극 관여했다는 이유였다.

상황을 설명하던 박씨는 "내게 총구를 갖다 대며 '간첩X', '폭도X'이라고 욕하는 장면은 가슴에 박혀 잊히지도 않는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이후 박씨는 바다 건너 전주형무소로 끌려갔고, 그해 7월7일 진행된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간첩죄)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21세였다.
 

다행히 6개월 뒤 조기 석방돼 제주에 돌아온 박씨는 교직에 있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이른바 연좌제로 인해 혹여 자식들에게 '빨갱이 꼬리표'가 붙을까 노심초사한 세월이 70년이었다. 아들 임용훈씨(70)는 "수형인 실태조사(2013년)가 시작되고 나서야 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됐다"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는 제주4·3 70주년이던 지난해 생존수형인 17명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국방경비법 위반 등에 대한 재심을 청구, 올해 1월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어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6일 제23차 제주4·3중앙위원회를 열고 '제주4·3 희생자 및 유족 결정안'을 심의·의결, 박씨를 희생자로 공식 인정하면서 박씨는 이날로써 지독했던 4·3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인터뷰 내내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를 매만지던 박씨는 "영감(남편)이 내 억울함을 일대기로 써준다고 했는데 병에 걸려 요양원에 가 있다"며 "영감 앞에서 '나 이제 떳떳한 사람이 됐다'고 만세를 부르고 싶었는데…"라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어 그는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고 나라가 인정해 주니 마음의 한이 다 풀렸다"며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오늘 죽어도 좋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씨는 끝으로 아직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게 "이제 눈치 볼 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됐으니 기쁘게 생각하고 기운을 내 달라"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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