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기억해야 할 역사주(역사지)…"

벚꽃이 흩날리던 지난달 30일 제주시 도남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홍순 할머니(99)는 첫째 아들 박부삼씨(73)과 손자 박민수씨(42), 증손자 박현성군(10)을 곁에 두고 제주4·3 발발 후 고통 속에 지내 온 지난 71년의 세월을 어렵사리 꺼내 놓았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홍 할머니는 28살이었던 1948년 12월16일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속칭 '난시빌레(냉이밭)'에서 남편 고(故) 박상택씨(당시 31살)를 잃었다. 이 때 아들 박씨는 두 살배기였다.

홍 할머니는 이날 군인들의 지시로 북촌국민학교에 나갔다가 검은색 군용 차량에 실려가는 남편과 시아주버니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한참을 쫓아가다 하릴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탕, 탕, 탕' 총소리와 함께 '사람이 죽었다'는 외침이 들려 뛰어가 보니 남편은 총탄에, 시아주버니는 칼에 난자 당해 죽어있었다고 홍 할머니는 전했다. 당시 희생자는 총 24명이었다.

이는 4·3 당시 북촌리에서 발생한 첫 인명피해였다. 군경은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였고, 홍 할머니는 이로 인해 두 시신을 집 앞 밭 언저리에 누여 흙만 덮어 뒀었다고 했다. 시신은 며칠 뒤에야 제대로 수습됐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달 뒤인 1949년 1월17일에는 북촌리 일대에서 일명 '북촌리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숨지자 군인들이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로 불러 모아 무려 400명 이상을 총살한 것이다.

당시 홍 할머니는 급하게 가족 사진 몇장을 아궁이 밑에 숨긴 뒤 아들 박씨 삼남매를 데리고 북촌국민학교로 향했다. 홍 할머니는 민보단이었던 남편과 굶주린 아이들을 내세워 읍소하고, 또 읍소해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민보단은 경찰이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또 다른 주민들로 구성한 외곽조직으로 주로 마을 보초나 총알받이 역할을 했다. 사실상 경찰의 강요로 조직이 구성되면서 당시 민보단 인원은 무려 5만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홍 할머니는 "남편은 민보단이었는데도 주민들을 도와 평판이 좋았는데… 결국 민보단 때문에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살게 됐다"라는 말로 복잡한 심경을 대신했다.

홍 할머니의 남편은 1960년대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4·3 희생자로 인정됐고, 이어 홍 할머니와 아들, 손자, 증손자가 차례로 4·3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홍 할머니 가족이 4·3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홍 할머니 가족에게 4·3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던 탓이다.

아들 박씨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제 아들에게 (4·3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최근 많은 4·3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고 전했다.

손자 박씨도 "성인이 되고 나서야 할머니 이야기를 접하고 4·3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인데 고학년이 되면 4·3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쳐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증손자 현성군은 이날 인터뷰 말미 할아버지로부터 4·3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현성군은 "최근에 할머니 100세 잔치가 있었는데 '나는 나비'를 불러드렸다"면서 "고생하신 할머니가 오래 오래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두 손을 모았다.

홍 할머니는 "이제 친·외손자를 합하면 모두 47명"이라며 "4·3 역사가 대대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원(願)이 없겠다"고 웃음을 지었다.

홍 할머니는 이날(3일) 오전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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