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중 누구 하나라도 먼저 떠나면 그 빈자리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제는 사돈, 며느리, 딸의 관계가 아니라 한 가족, 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어머니 김말선씨(105)와 친정어머니 홍정임씨(88)를 16년째 모시고 살고 있는 박영혜씨(67)는 불가피하게 맞이해야만 하는 이별의 시간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2001년 서울 마포동에서 목사로 지내던 남편이 아무 예고도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시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된 박씨는 편찮으신 친정어머니가 걱정돼 셋이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다.

도시적인 시어머니와 털털한 어머니가 만나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취향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랐던 두 어머니는 서로를 ‘사돈’이 아닌 ‘할머니’라고 부르며 서서히 가까워져갔다.

그렇게 5년쯤 흘렀을 무렵 서귀포에서 일을 하게 된 아들이 공기 좋은 제주에 와서 살기를 권유했고, 두 어머니의 건강에도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주행을 결심하게 됐다.

낯선 환경이 싫으셨던 두 어머니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박씨는 따뜻한 제주에서 세 명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하며 설득한 끝에 2010년 10월 서귀포시 남원읍에 터를 잡게 됐다.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하셨던 두 어머니도 포근한 날씨 속에서 푸른 바다와 유채꽃을 느끼며 “오길 잘했다”고 좋아해주셨다. 시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 이곳저곳을 여행할 순 없지만 푸른 자연의 품에 안겨 셋이서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박씨는 말했다.

하지만 생계 유지가 문제였다. 직장에 다니거나 귤을 따러 다녀볼까 생각했지만 연로하신 두 어머니만 놔두고 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한 게 집 바로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다.

2년 전 문을 연 카페의 이름은 ‘마더카페’다. 엄마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쉬다가라는 의미에서다. 코앞에 집이 있으니 수시로 들러 두 어머니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카페에 손님이라도 많을 때면 제때 끼니를 챙겨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기 일쑤다. 그럴 때면 편히 계실 수 있도록 요양원에 보내드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변의 권유가 솔깃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양원 이야기만 나오면 토라져버리는 시어머니의 모습에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박씨를 ‘사모’라고 부르는 시어머니는 잠결에 늘 “사모야, 사모야”하고 찾으신다. 그리고는 “사모야 고맙고 감사하다”, “옆에 있는 할머니도 너무 고마워요”라고 잠꼬대처럼 말하신다. 캄캄한 데서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진심이 가슴으로 전달된다고 박씨는 말했다.

‘험한 꼴 보기 전에 이대로 셋이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날도 많다. 박씨는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먼저 떠나면 빈자리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며 “자다가 숨을 불규칙적으로 쉬시면 밤을 새서 지켜보는데 그때 혼자라는 게 너무 무섭다”고 토로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죽기 전에 너 신랑하나 얻어주고 가야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이별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변의 권유를 모두 뿌리쳤다.
 

두 어머니가 드시는 밥이 달라 매일 잡곡밥과 찹쌀밥을 따로 지어야 하고, 한 시간 동안 옆에서 밥을 떠먹여드려야 하고, 대소변 수발도 들어야 하지만 “이대로가 행복하다”고 박씨는 말했다.

박씨가 지쳐할 때면 친정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밥을 떠먹여주신다. 시어머니는 손님들이 와서 주고 가는 군것질거리를 감춰놨다가 몰래 친정어머니에게 건네신다.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는 두 어머니를 볼 때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박씨는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 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며 “시어머니 건강이 더 안 좋아시셨는데 얼른 일어나셔서 셋이서 손잡고 날 좋은 날 소풍을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박씨는 두 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공적으로 6일 제44회 어버이날 행사에서 효행자에 선정돼 국민포장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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