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2일 저녁 충북 충주시에 사는 아들 윤바울씨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송정순씨(90)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인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달 27일 정부로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른바 트라우마(Trauma)로 고통받는 후유 장애자로서는 처음으로 제주4·3 희생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송씨는 72년에 걸친 고통의 세월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에서 태어난 송씨는 일제강점기 아래 전남교원앙성소를 졸업한 뒤 제주에서 교사를 지냈던 송문평씨의 둘째 딸이다.

송씨는 유년시절만 떠올리면 당시 추자도나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서귀포시 구좌읍 세화리 등 궁벽한 촌 동네로만 이사를 밥 먹듯이 해야 했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아버지가 "절대 우리의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며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는 바람에 일제의 눈엣가시가 됐던 탓이다.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송씨는 1948년 7월 아버지를 따라 교사가 됐다. 운명적이게도 첫 임지는 해방과 함께 교장으로 승진한 아버지가 몸 담고 있던 삼양공립국민학교(현 삼양초)였다.

그렇게 평탄할 것만 같았던 송 할머니의 삶이 송뚜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49년 1월3일 그 때부터였다.

당시 오빠는 군대, 막내 여동생은 교원양성소에 있던 터라 송씨는 부모님과 함께 학내 교장 관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1948년 4·3이 벌어진 뒤 휴교령이 떨어진 그 해 가을쯤부터였다. 세 가족 모두 '누가 교사에게 해를 입히겠느냐'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던 1949년 1월3일 새벽, 송씨는 때 아닌 불길이 창문을 비추자 아버지가 "잠깐 학교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관사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경찰서인 삼양지서를 습격한 무장대가 인근에 있던 학교에도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송씨와 송씨 어머니 고축행씨는 결국 밖으로 나와 아버지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수라장이 돼 버린 학교 곳곳을 기웃대던 두 모녀는 후미진 곳에 있던 한 창고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흉기로 난자당한 채 피범벅이 된 참혹한 모습이었다. 두 모녀에겐 눈물 조차 나지 않는 황망한 이별이었다.

더군다나 당장 눈 앞에 시신이 있는 데도 두 모녀는 이를 수습 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직원들이 "삼춘, 폭도우다(어르신, 폭도예요)!"라고 외치며 도망을 재촉했던 탓에 급한 대로 시신을 숨겨 놓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지옥과도 같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두 모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친척·지인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가마니에 담고 인근 야산에 가매장했다.

송씨는 "덕망 높은 분이셨던 만큼 참 많은 분들이 슬픔에 겨워했다"며 "3년상 할 때가 돼서야 아버지 시신을 고향으로 모셨는데 그게 아직도 가슴이 쓰리다"고 했다.

송씨의 험난한 삶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아들 윤바울씨는 어머니 송씨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밤마다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했다. 새벽 두세 시가 되면 어김 없이 벌떡 일어나 누군가를 찾는가 하면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더랬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가 찾아 왔다', '도와줘야 된다' 등 모두 그 날의 기억들 뿐이다.

윤씨는 "45년 동안 떨어져 살다 3년 전부터 어머니를 충주로 모셔 함께 지내고 있는데 어릴 때 이상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행동이 여전한 걸 보고 병원에 가 보니 망상·불안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어렵사리 목숨만 건졌지 4·3 희생자와 다름 없다고 생각했던 윤씨는 2018년 가을쯤 어머니를 4·3 희생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을 냈고, 2년에 가까운 기다림 끝에 지난 27일 4·3 희생자 인정 판정을 받아냈다.

이 발표 직후 두 모자는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송씨의 4·3 희생자 인정은 송씨 가족의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소원이었다.

송씨는 "눈만 좀 밝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날이 갈 수록 어두워만 간다. 참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벌써 72년이나 지났다는 게, 또 72년 만에 인정받았다는 게 시원하고 섭섭하다"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다들 많이 도와주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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