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칠순이 된 백발의 동생은 총알이 흩뿌려진 흙바닥에서 유해로 발견된 형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오열한다.

6·25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형제의 가슴 아픈 운명은 50년이 흐른 뒤에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제주 6·25전쟁 참전 유공자인 고(故) 안택영, 안택봉(88·제주시 삼양동) 형제의 삶이 꼭 이렇다.

제주시 삼양동에서 나고 자란 안씨 삼형제의 둘째 택영씨과 막내 택봉씨는 제주4·3의 악몽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징집되면서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택영씨가 갓 결혼한 22살의 새신랑, 택봉씨가 19살의 철부지였던 때다.
 

그렇게 택영씨는 제주시의 한 부둣가, 택봉씨는 친구들과 함께 제주공립농업중학교(현 제주고)에서 출발해 각각 육군 부대에 배치됐다.

안타깝게도 택영씨는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보병사단 일등병 신분으로 강원 원통지구 전투에서 활약하다 전사했다.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 수여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긴박한 전장 상황으로 인해 그는 결국 실물 훈장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편 택봉씨는 21살 때였던 1952년 지리산 전투지구에서 벌어진 기습작전에서 활약한 뒤 대구로 가 6개월 간의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9보병사단에 배치된 그는 그 해 10월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열흘 새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나서야 후퇴했다. 이 때 택봉씨도 훈장격인 특별상이기장을 받았다.

택봉씨는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 속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지휘했다"며 "포탄에 찢긴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던 전장과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던 병원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통스럽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이듬해 광주로 가 간부 후보생 교육을 받고 중위까지 진급한 택봉씨는 1956년 6월 제대해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마음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일찍이 휴가 때 택영씨의 부고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7년 간의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유해마저 찾지 못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의 억장이 무너지게도 6·25전쟁 후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택영씨의 유해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혹했다.

이 같은 두 형제의 가슴 아픈 사연은 최근 육군본부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확인됐다. 택봉씨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후회는 없다'는 생각에 (훈장 수훈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택봉씨는 "첫째 형도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돼 구사일생했었다"며 "세 아들 모두 나라에 바쳤음에도 살아생전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독 그립다"며 어머니께 공을 돌렸다.

전쟁으로 일생을 떨어져 살았던 두 형제는 24일 오전 제주시 신산공원 6·25참전기념탑 앞에서 열리는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화랑무공훈장으로 재회한다. 택봉씨는 이날 행사에서 자신의 훈장과 함께 택영씨의 훈장까지 대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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