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17일 오후 7시 제주시 연동 헌혈의집 신제주센터.

검은색 마스크와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영어 문구가 적힌 운동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직원들에게 친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호기롭게 등장했다.

발열 검사부터 손 소독, 수분 섭취, 혈압·맥박·체온 측정, 문진까지 한 큐에 끝내는 그의 움직임 역시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곧장 오른쪽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채혈침대에 몸을 기댄 그는 굳은살이 박인 듯한 팔 안쪽을 몇 번 매만지더니 "이번이 꼭 600번째 헌혈"이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채혈바늘이 들어가자 "처음이나 지금이나 떨리긴 마찬가지"라며 너스레도 떨었다.

제주 이주 2년차 '헌혈왕' 임종근씨(63·제주시 도두동)의 이야기다.
 

경기도 가평에서 5남매 중의 삼남으로 태어난 임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게 중학교 대신 의료기기 생산 공장으로 가 용접공이 된 14살의 그는 제 처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 갔다.

인생의 전환점은 7년 뒤, 21살이 되던 1978년에 맞았다.

때때로 지방병원에서 의료기기 수리 작업을 했던 임씨는 프레스 작업 중 손가락 등이 절단되는 사고가 날 때마다 혈액 부족 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을 마음의 짐으로 여기다 그 해 3월21일에 첫 헌혈을 했다. 그 땐 그저 한 번의 경험이었다.

그러다 그 해 어느 한 겨울날, 그는 무턱대고 성당으로 향했다. 불현듯 찾아온 울적한 마음에 "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언제쯤 연탄가스 냄새 나는 지하 셋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라고 외치며 한참을 하소연했더랬다.

돌아온 대답은 "건강이 복이다" 뿐이었다. 심드렁하게 성당을 빠져나가는 길, 손수레에 한가득 배추를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한 장애인의 모습은 임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 순간 '나도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때 임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헌혈이었다. 이후 평생 헌혈하기로 마음 먹은 임씨는 두 달에 한 번씩 꼭 헌혈을 했다. 성분(혈소판·혈장)헌혈이 가능해진 1990년대부터는 2주에 한 번씩 헌혈을 했다. 쌓여가는 헌혈장은 모두와 나눴다.
 

헌혈은 임씨에게 더 큰 자신감을 선물했다.

남몰래 가슴에 묻어왔던 배우지 못한 설움을 깨고 24살 때부터 독학을 시작한 것이다. 4년 만에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친 그는 31살이 되던 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2018년 6월까지 무려 30년간 공직생활을 해 왔다. 완벽한 변신이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꾸준히 헌혈을 해 오던 중 43살이던 2000년에 고혈압 진단을 받은 것이다. 임씨는 이 때부터 매일 달리기 시작했다. 건강해야 더 오랫동안 헌혈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원초적인 생각에서다.

지난 20년 간 임씨는 마라톤 풀코스(41.195㎞)를 60번이나 완주했고, 이의 2배 이상을 뛰어야 하는 울트라 마라톤(100㎞)도 44번이나 뛰었다. 2018년에는 극한의 4대륙 사막마라톤(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남극·250km)까지 완주해낸 그다.

임씨는 최근 예기치 못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생애 마지막 꿈인 미국 LA~뉴욕 코스(5500㎞) 완주를 못하게 됐다고 크게 아쉬워했다. 대신 그는 헌혈 제한 나이인 70살까지 2주마다 헌혈을 한 뒤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임씨는 "헌혈은 그저 하늘에 적금을 붓는 것, 목마른 사람에게 흐르는 물을 퍼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요즘 코로나19로 헌혈자가 줄어 혈액이 많이 부족한데 많은 분들이 용기내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의 샘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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