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에 여념이 없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브렉시트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뭡니까?” 순간 트럼프는 "뭐라고요, 브렉시트?"라고 되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기자가 재차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것 말이오”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트럼프는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빠져야 해요”라고 주섬주섬 말을 엮었다.

‘브렉시트’. 한국인 등 비영어권 사람들이 이 말을 모르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영미권 사람들이 이 용어를 모른다면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지금 세계를 달구는 이 정치적 용어를 모르고 있다면 한심한 노릇이다. 브렉시트의 영어 표기는 'Brexit‘다. Britain(영국)과 Exit(퇴출)의 합성어다.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것을 뜻한다.

앞으로 열흘간 브렉시트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가 될 것이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듣게 될 말이다. 오는 23일 영국이 브렉시트, 즉 EU탈퇴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때문이다. 브렉시트를 놓고 영국 국론이 팽팽하게 분열되어 있고, 유럽은 영국이 EU를 탈퇴했을 때의 파장과 후폭풍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이미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EU는 유럽 28개국이 가입한 국가 공동체다. 2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은 유럽대륙이 자성의 바탕 위에 2차 대전 이후 경제공동체로 시작해서 정치 통합까지 지향하는 세계 역사상 드문 국가공동체를 세웠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축이지만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의 전통 열강이 모두 중요한 멤버로 참여했기에 그 결속력과 권위는 막강하다.

그런데도 왜 영국은 EU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요인, 즉 영국의 정체성과 경제적 문제가 얽혀 있다. 여기에 영국 국내 정치가 끼어들면서 브렉시트 찬반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영국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일원이면서도 독일 프랑스 등 대륙 중심의 EU체제에 삐딱하다. 국제정치적으로 영미동맹의 정체성과 자존심이 강하다. 유럽과 다른 정체성이 영국의 핏줄에 흐른다는 말이다. 영국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외교관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국은 유럽이 아니고 미국과 같다고 말한다. 일례로 거의 모든 EU회원국이 ‘유로’ 단일통화를 상용하지만 영국은 파운드화 사용을 고집한다.

경제적으로 EU는 세계 최대 경제블록으로 영국에 큰 이익을 주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EU는 영국의 수출시장으로서 매력적인 곳이다. 영국은 유럽의 자본이 몰려드는 투자처다. 그러나 브렉시트 찬성론자들은 EU에 내는 분담금이 너무 많은 데 비해 영국에 대한 경제규제가 커서 국가 이익이 침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렉시트가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은 최근 유럽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유럽은 근래 그리스 재정위기로 홍역을 치렀다. 역내 가난한 국가와 부자 나라 사이에 소득 간극이 생기면서 공동체 분열의 싹이 텄다.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지자 남부유럽과 동부 유럽의 값싼 노동력이 영국으로 몰려들면서 영국경제의 압박요인이 커졌다. 게다가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난민까지 대거 유럽으로 몰려들어 영국의 일자리가 이들 이주민과 난민들의 차지가 되자 영국인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브렉시트 논쟁을 둘러싼 국내 정치역학도 복잡하다. 브렉시트에 대한 의견차로 보수당이 쪼개지고 노동당내서도 찬반 여론이 분분하다. 같은 보수당 출신인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카메론 총리 이후 총리 후계자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유럽통합 개념을 히틀러나 나폴레옹의 망령을 불러오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원래 유럽통합에 대한 꿈은 영국에서 일찍이 싹텄다. 세계 1,2차 대전의 참극을 맛본 윈스턴 처질 총리는 “유럽을 미국과 같은 합중국으로 만들어야 평화가 확보된다”며 유럽통합에 관심을 보였고, 마가레트 대처 총리는 1973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참여에 앞장서기도 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이렇게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그 계승자인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가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밀어붙인 것도 이런 전통과 국민적 지지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차지하는 비중(투표권)은 8%로 미미하지만 정치적 비중은 크게 높다. 영국 없는 유럽연합을 생각하기 힘든 이유다. 때문에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영국은 EU를 떠나면 안 된다고 으르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지난 2월 유럽연합은 영국에 투자, 이민 등과 관련해서 독자적 권한을 갖도록 하는 예외조치를 취하면서까지 영국을 달랬다.

미국도 영국의 EU탈퇴를 우려한다. 영국이 EU와 결별할 경우 강력한 영미동맹에 의해 유지되던 유럽의 안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분리독립 이슈로 유럽을 당혹스럽게 했던 스코틀랜드도 브렉시트가 되면 영국에서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전 세계에는 약 200개의 국가가 있다. 우리는 한국만 복잡하고 격변을 안고 있는 나라인줄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따지고 보면 조용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서 가장 근대화의 경험을 많이 겪은 영국이 이런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국가권력이 참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合合分分 分分合合 分久必合 合久必分” (합하면 갈라졌고, 갈라지면 합해졌다. 갈라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해지고, 합해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갈라졌다.)

삼국지(三國志)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나온 중국 정치사의 큰 흐름이 이 짧은 16자로 상징된다. 이 구절은 비단 중국의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 역사를 관통해서 흐르는 국가간 정치적 무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는 23일 판가름날 브렉시트 논쟁을 보면서 ‘합합분분(合合分分)의 역사적 통찰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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