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울광장에는 스케이트 타는 어린이들을 볼 수 없다. 코로나19로 스케이트장을 열지 않았다.

누가 "서울 광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거침없이 대답할 서울 시민이 얼마나 될까. 썩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어디지? 시청앞 광장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하고 조금은 망설이며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통칭 '시청앞 광장'의 공식 명칭이 '서울광장'이다. 서울에 꽤 오래 살았지만 '서울광장'이라고 할 때 이미지가 즉각 떠오르지 않는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만,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면 광장 이름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광화문광장'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이미지와 장소가 즉각 떠오르지만, 서울광장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발자국과 정취가 담겨 있는 가장 오래된 대한민국의 광장인데도 말이다.

"서울광장은 이름 없는 광장"이라며 정체성을 가진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책으로 써낸 이들이 있어 흥미롭기도 하고 그럴 성싶기도 하다.

초대 서울연구원장을 역임한 최상철 박사와 전북연구원장을 지낸 한영주 박사가 공동 집필한 '서울광장의 재조명'이란 책이 지난 10월 말 서울연구원에 의해 출판됐다. 130쪽 분량으로 간편하게 편집된 이 책은 서울의 도시 연구와 계획에 깊숙이 참여했던 두 사람이 '서울광장'을 키워드로 해서 그 주변의 도시개발 역사를 스케치했다.

매일 다니는 길이나 동네도 책에서 읽거나 전문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면 새롭게 보인다. 이 책에선 서울광장의 이름을 새로 생각해보자는 주장을 결론 부분에서 제시하지만, 그보다는 서울광장이 어떻게 계획되었고 바뀌어 왔는지 또 그 주변의 동네, 건물, 길이 어떤 유래를 갖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정도전의 왕도입지론(王都立地論)부터 북창동 차이나타운의 철거 일화까지 서울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서울광장에서 한국은행으로 통하는 소공로(小公路) 이름의 유래도 이 책을 보고 알았다. 오늘날 조선호텔의 자리는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과 결혼하여 살았던 집터다. 그래서 작은 공주의 집이라는 뜻의 소공(小公)주택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소공동'이라는 동네 이름과 '소공로'라는 길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광장은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경성부청사(서울시청)의 앞마당이 개념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덕수궁)이 서울광장 형성의 원초적 씨앗이 되었다는 게 서울도시계획 역사를 탐구한 필자의 견해다. 광장 계획의 주인공은 대한제국의 한성판윤(서울시장) 이채연(李采淵). 역관출신인 그는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1년간 머물렀다. 이때 이채연은 방사성 가로망과 광장 중심의 바로크식 워싱턴시의 도시계획에 심취했다.

이채윤은 미국에서 돌아온 후 한성판윤이 되자 '한성도시개조사업', 즉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워싱턴DC의 방사선 가로망을 모델로 한 도시계획을 구상했다. 구한말 격변의 시기를 맞으면서 이채연의 도시계획은 흐지부지됐다. 그 후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도시계획 사업을 추진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에 '광장'공간을 확보한 게 지금의 서울광장의 시원이다. 따라서 서울광장이 서울시청의 앞마당이 아니라 이채연이 구상했던 덕수궁의 동마당의 개념으로 그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정궁인 덕수궁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경성부청사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의 도시 발달은 덕수궁이 중심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메트로폴리탄으로 커진 서울은 곳곳에 수많은 광장이 있지만 전통, 규모, 정체성으로 볼 때 광화문광장, 서울광장, 숭례문(남대문)광장, 서울역광장이 서울을 대표하는 광장이다.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청계광장을 포함하여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짧은 거리 안에 일렬로 늘어선 이 5개의 광장은 정치, 종교, 각종 전시, 기념 퍼레이드 등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서울을 다이내믹한 도시로 만들어 왔는데, 그 중심이 서울광장이다.

지난 수년간 촛불집회 태극기집회 등 정치적 행사가 광화문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의 애환이 분출하고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공간으로 활용되어온 곳은 서울광장이라고 강조하는 두 필자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민족적 울분과 함께 독립 시위가 일어난 이래 100년에 걸쳐 서울광장은 4·19혁명, 6월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정치 시위의 광장이 되었고, 5·16 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정변을 성공시킨 후 얼굴을 대중에게 드러낸 곳도 서울광장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에 환호하는 100만 시민의 '붉은 악마' 응원이 펼쳐지는 등 시민들의 축제 장소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묘미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두 필자가 거의 50년에 걸쳐 연구실과 현장에서 서울을 집중해서 연구하고 고증한 경험을 토대로 일반인을 위해 쓴 글이라는 데 있다. 최상철 박사는 서울시 공무원을 거쳐 서울대환경대학원장과 서울연구원장을 지낸 1세대 도시 전문가다.

광장은 가장 도시다운 상징 장소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서울광장의 미래를 위해 세 가지 담론을 제시한다. 정체성이 부족한 '서울광장'이란 이름보다 더 나은 이름을 찾아보자는 제안이 그 첫째다.

둘째는 광장을 상징하는 상징적 기념물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필자는 서울광장은 “초점이 없는 광장이고 교통사고 위험을 느끼며 접근해야 하는 광장”이라고 주장한다. 포토존이 될 만한 기념조형물을 세우고 도보 접근을 더 쉽게 하자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이곳으로 옮겨올 수도 있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수많은 시민들을 상징하는 기념조형물을 만들 수도 있다.

셋째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2㎞에 걸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다섯 개의 광장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연결하는 지하도시 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제안 모두 의미가 있지만 마지막 제안은 서울의 새로운 미래공간으로서 소망스러워 보인다. 현대의 토목건축 기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결합한다면 21세기 서울의 새로운 도심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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