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행정의 중심이었던 제주목 관아.

제주목 관아는 1434년(세종 16년),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조선시대 내내 재건됐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건물 상당수가 다시 허물어졌다.

또 해방 후 1949년 다시 발생한 화재로 오랜 시간 동안 터만 남아있었다.

이후 1993년 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며 1999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제주 목관아 복원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다.

1998년 제주시는 제주목 관아 복원을 위해 제작자 이형상의 후손이 소장해오던 탐라순력도를 3억 원에 사들였다.

복원 작업에 탐라순력도가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는 화첩 내에 조선시대 당시 제주목 관아의 건물양식과 구조, 배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탐라순력도 덕에 조선시대 제주의 중심이었던 제주목 관아는 2002년 복원을 마무리하고 시민 품으로 되돌아왔다.

이처럼 탐라순력도는 300여 년 전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공간 복원 자료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제주목 관아 이외에도 제주성 내 군사지휘소 겸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지어진 운주당(運籌堂) 복원에도 탐라순력도의 역할이 빛났다.

탐라순력도는 당시 운주당 위치와 건물의 규모 등을 파악하는데 활용됐으며, 이에 힘입어 ‘운주당지구’는 지난해 향토유형유산 제26호로 지정됐다.

탐라순력도 제작자이자 완고한 성리학자였던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제주 전역에 분포한 3개소의 읍성과 9개소의 진성을 순력하는 장면과 함께 관방시설인 연대와 봉수를 포함한 제주의 명승지, 해안포구, 목장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도록 지시했다.

양상호 제주국제대 건축학과 교수는 탐라순력도 국보 지정 추진에 따른 전문가 의견서에서 "탐라순력도는 주로 순력을 기록한 그림이긴 하지만 주변의 자연 환경과 시설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지역의 건축적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역사자료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탐라순력도에는 성곽, 객사, 동헌, 향청, 작청 등 조선시대 제주의 관아시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어 추후 복원자료로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전문가들은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관아건물의 경우 단순히 건물 외관 뿐 아니라 건물의 성격과 용도, 건축형식까지 알 수 있도록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세밀한 표현 덕에 건축 구조, 창호의 설치 방법과 짜임새, 난간의 구조, 계단설치 방법, 출입문, 담장 등 제주도 관아 건축의 특징을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양 교수는 "현재 제주건축사의 경우 민가건축 이외의 연구가 거의 전무하다"며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탐라순력도는 제주 관아건축에 관한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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