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김포에 있는 지인의 농가를 방문했다. 처마 밑 빈 공간에 연탄 수백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텃밭에는 연탄재가 흩어져 있었다. 오래만에 연탄을 보며 문득 구공탄의 온기에 기대어 살았던 젊은날의 기억과 함께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싯귀가 머리를 스쳤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을 잊고 산지 오래다. 연탄 한 장 값과 쌀 한가마 값이 가을철 신문과 방송 뉴스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것이 30년 전의 일이다. 한때 '국민연료'로 불렸던 연탄이 지금은 도시 골목 식당의 드럼통 화덕에서나 보게 된다.

연탄이 한국에서 연료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 일제 시대다. 그후 연탄소비는 계속 늘어나 1987년 연탄용 석탄 소비가 2338만 톤으로 절정을 이뤘지만 그후 소비는 계속 감소했다. 2018년 연탄 제조에 쓰인 석탄은 약 91만 톤으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소비량보다 적다.

이 시점에서 연탄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옛날의 낭만을 들추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연탄 소비가 줄어든 것과는 판이하게 한국의 석탄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세계 5위 석탄소비국이 됐다. 그 결과 나라 안에서는 미세먼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나라 밖에서는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 즉 탄소 대량 배출국으로 '기후악당'이라는 국제여론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석탄으로 만든 전기에 깊숙이 빠져 살면서 '석탄을 퇴출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는 에너지 소비의 모순 속에 갇혀 있다.

석탄은 한국 산업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석탄을 때서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소가 60개나 된다. 2018년 기준 한국의 전력공급량의 약 40%를 석탄화력이 담당하고 있다. 또 석탄은 철강과 시멘트 생산에 절대 필요한 재료다.

우리는 석탄발소에서 생산한 전기로 냉장고, PC, 냉난방기구, TV를 돌리고 또 전철을 타고 다닌다. 철강으로 만든 자동차를 타고 시멘트로 만든 아파트에서 사는 게 모두 석탄과 연계되어 있다. 육안으로 검은 석탄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석탄이 만든 전기, 철강, 시멘트에 중독되어 있다

한국은 2018년 석탄 약 1억3000여만 톤을 수입했다. 중국, 인도,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석탄 수입국이다. 한국에 석탄을 수출하는 호주, 인도네시아, 러시아, 캐나다로서는 한국이 고맙지만 기후재앙 예방 여론을 주도하는 유럽연합(EU) 국가로부터는 눈총을 받고 있다.

2050년까지 제로 카본(zero-carbon)을 실현해서 기후재앙을 막자는 국제여론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과 미국의 바이든 정부 출현으로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모든 화석연료 사용이 궁극적 퇴출 대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퇴출 0순위가 바로 탄소 덩어리인 석탄이다.

이런 추세에 부응하여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가을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목표는 정했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론이 없어 보인다. 선언은 선언이고 적당히 눈치보며 갈 것인가. 기후변화의 속도를 볼 때 그렇게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석탄 퇴출에 앞장서는 나라로 영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영국은 2022년 마지막 화력발전소의 문을 닫고 석탄 시대를 사실상 마감한다.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면서 석탄 에너지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은 석탄시대의 전성기였고, 그 중심에 영국이 있었다. 석탄은 산업의 동력으로서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했다. 1919년 탄광촌에서 태어난 소설가 D.H.로렌스는 자전적 소설 '아들과 연인'은 탄광을 배경으로 소년노동을 비롯한 광산노동자의 비참하고 암울한 영국 사회를 그려낸 걸작이다. 20세기 중반 영국의 석탄소비는 2억톤에 이르렀다. 1970년대 광산노동자의 파업은 선진 영국경제와 사회를 마비시킬 정도에 이르렀고 노동조합에 맞서 영국병을 수습한 것이 마가렛 대처 총리였다.

현재 영국의 연간 석탄 소비량은 800만 톤으로 감소했다. 첫 증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한 250년 전 수준에 불과하다. 영국의 석탄을 대체한 것이 20세기 말에 터진 북해 유전이고, 21세기 들어서는 풍력과 태양광 등 대체 에너지를 집중 개발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초기 원자력 발전 선진국이었지만 프랑스와 일본에 비해 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원자력 발전소에 새롭게 투자를 늘리고 있다. 그 이유는 기후재앙에 대비하여 에너지 정책을 리셋(reset)한 결과로 보인다. 석탄으로 일어선 나라가 석탄을 제일 먼저 털고 나서는 것은 큰 시사점이다.

한국이 앞으로 30년 안에 탄소중립을 실현하려면, 즉 온실가스 배출을 멈추려면 고통스럽지만 석탄과 이별할 준비를 체계적으로 서둘러야 한다. 석탄 조기 퇴출을 전제로 한 새로운 에너지 자원의 배합(Mix)을 창안하고 에너지 효율화를 높이기 위한 연구개발(R&D)과 정책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개발을 적극 해야 하지만 그 보완책으로 차세대 원자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나지 않았듯이, 석탄이 있어도 석탄시대는 끝나려 하고 있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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