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매년 40만~50만명이 귀농 귀촌하고 있다. 답답하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지금과는 다른 제2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서다. 한때 은퇴나 명퇴를 앞둔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30대와 그 이하 연령층이 매년 귀촌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농촌, 어촌, 산촌에서의 삶을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뉴스1이 앞서 자연으로 들어가 정착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예비 귀촌인은 물론 지금도 기회가 되면 훌쩍 떠나고 싶은 많은 이들을 위해.
 

양의지, 박병호, 정수빈, 노경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쟁쟁한 프로 야구선수들이 제주에 오면 찾는 감귤 농장이 있다.

농장 이름도 '홈런농장'. 이곳을 꾸려가는 청년 농부는 평생을 손에 쥐고 있던 야구배트와 공을 5년 전 내려놨다.

그라운드가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밭에서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는 홈런농장 오장훈 대표(37)를 만났다.

◇ 시골소년서 프로 야구선수, 그리고 다시 귀향
서귀포의 감귤마을 한남리에서 나고 자란 오 대표는 12살이 되던 해 야구선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사실 제주 시골마을에서 프로 야구선수를 꿈꾸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전교생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학교에 만들어진 운동부에서 야구를 배운 1년 남짓한 시간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그는 "잠깐 야구를 배워보니 운동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도해주는 선생님과 부모님을 설득해 서울로 상경할 수 있었다"며 "12살부터 홀로 상경해 20여 년간 야구선수의 길을 쭉 걷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퓨처스 리그에서 6관왕을 달성하는 등 차세대 거포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2011년에는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됐지만, 2016년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야구선수를 선택했던 12살 그때처럼 다시 인생의 전환기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오 대표 역시 여느 프로 선수들처럼 지도자의 길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의 선택은 '귀향', 그리고 '귀농'이었다.

야구선수 생활 내내 감귤 농사를 지으며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셨던 부모님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그는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님 연세도 많이 드시면서 제가 필요해질 시점과 은퇴 시점이 맞물렸다"며 "젊은 농부로서 미래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어깨너머로 봐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흔쾌히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과감히 야구배트를 던진 그는 그렇게 고향 한남리로 돌아왔다.

◇ 엘리트 농업에 더해진 아들의 젊은 감각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농사 역시 오 대표에겐 '맨땅에 헤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오 대표의 아버지 오병국씨(74)는 감귤 농법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큼 지역에서 소문난 능력자다. 특히 레드향이 제주에 도입될 때부터 홍보와 기술육성에 힘쓴 선구자로도 불린다.

함께 농장을 일구고 있는 아버지가 둘도 없는 선생님인 셈이다.

지금 그는 부모님과 함께 1만 평이 넘는 농장을 일구며 황금향, 레드향, 한라봉, 감귤 등 다양한 품종을 수확해내고 있다.

특히 생산과 유통에만 집중해왔던 '엘리트 농부' 부모님과는 달리 오 대표는 젊은 감각으로 지난해 황금향 체험농장을 꾸려내기도 했다.

전직 야구선수라는 장점을 십분 살려 체험농장 내에 야구와 관련한 이벤트들을 접목했다.

야구게임 체험존,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의 오락부터 야구복을 착용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을 마련하기도 했다.

오 대표는 "제주도에서 여름에 귤 수확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걸 파악하고 황금향 체험 농장을 준비했다"며 "버튼만 누르면 비닐 하우스 가림막이 내려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만드는 등 준비를 열심히 해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여름에 지난해 발견됐던 문제점들을 정비한 후 내년부터 다시 체험농장을 재개할 계획이다.

◇ 든든한 팬과 동료…"농부로서 자긍심 키울 것"
야구선수였던 그가 재배한 귤을 믿고 찾는 VIP고객은 다름 아닌 팬들과 동료선수들이다.

아들이 귀농한 후 부모님의 유통 판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홈런농장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의 절반 이상은 오 대표가 포털 스토어와 SNS 등을 통해 직거래로 유통한다.

오 대표는 "야구선수 출신이다 보니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고, 한 번 저희 귤을 먹어본 팬분들이나 선수들의 주문이 꾸준히 이어져서 판매가 잘 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오 대표는 몸담았던 롯데와 두산 선수단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매년 감귤을 보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오 대표가 두산 선수단에 보낸 감귤과 편지가 화제가 되며 주문 물량이 100배 가까이 뛰기도 했다.

특히 양의지 선수는 1년에 레드향을 수십 박스씩 주문하는 홈런농장의 VVIP고객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품질 좋은 귤을 생산해야 한다는 오 대표의 책임감은 매년 커져간다.

그는 "저를 믿고 주문해주는 고객들이 많기 때문에 물건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며 "관리가 조금만 잘못돼도 당도나 품질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아버지 옆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억대 연봉,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형 선수들이 포진해 있는 프로 야구세계에 몸담았던 그는 이제 농부로서의 자긍심을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오 대표는 "결국에는 제가 만족할 수 있는 농업, 내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농업인이 되는 게 최종 목표"라며 "남에게 보여주기식이 아닌 농장을 하나하나 가꾸고 내실을 다지면서 평생 할 이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려고 땀 흘리고 있다"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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