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5월 30일과 31일 50개국 정상급 인사가 온라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2021년 P4G서울정상회의'를 주재했다. 녹색성장 등 환경을 주제로 2년 전 덴마크가 창안해서 열었던 국제회의를 한국이 이어받아 주관한 것인데, 팬데믹 사태로 기후변화가 큰 이슈가 되면서 국제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애니메이션 영화 같은 무대에서 탄소중립정책 의지를 재확인하고 개도국의 탄소 감축도 지원하겠다고 연설했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은 5월 22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미국대통령과 넷제로(net-zero:탄소중립)를 다짐했고, 2030년의 탄소감축량을 상향 조정하고 해외화력발전소에 대한 공적금융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이행계획을 천명했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후변화 위기와 탄소중립을 앞장서 거론하며 발걸음을 분주히 옮기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온난화' 또는 '기후변화'란 말이 나오면 마치 공상과학소설 얘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던 게 불과 30년 전 일이다.

1992년 3월 외교부의 과장 한 사람이 유엔본부 로비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푸념을 털어놓았다. "이거 큰일 났어요. 석달 후면 브라질에서 큰 국제 환경회의가 열리는데 우리 정부가 전혀 대표단을 파견할 생각이 없으니. 한국에 매우 중요한 회의이니 언론에 좀 반영해 주세요. 제발."

유엔과 국제기구의 환경 및 과학 관련 국제회의를 담당했던 그 외교관은 유엔환경계획(UNEP)이 기후변화를 주제로 최초의 환경정상회의를 기획하는 것을 추적했다. 그는 유엔의 실무준비 회의에 참석하면서 이 정보를 윗선에 보고하고 총리급 이상 고위 정부대표 참석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아무도 참여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언론플레이에 기대를 걸고 만나는 기자마다 붙들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 국제회의가 1992년 6월 5일 '세계환경의 날'에 맞춰 개막한 역사적인 리우 지구정상회의(Earth Summit)였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총리가 참석해서 체면을 유지했지만, 사실 당시 대통령을 비롯해서 사회 주류 세력은 기후변화 관련 국제환경 회의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은 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자랑하는 산업국가였다. 소수의 선진국을 제외하면 많은 나라가 그랬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지난 30년 동안 지구환경 문제에 대한 세계의 인식이 빠르게 변했다. 한국은 더 빠르게 변했다. 태풍의 진로와 강도가 옛날보다 더 강해지고 중국이 내뿜는 미세먼지는 더 짙어졌다. 좁은 국토 속에 사는 한국 국민의 인식이 기후에 더 민감해진 것이다.

인간활동, 특히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의 대량 사용으로 온실가스(탄소)가 공기에 축적되면서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은 20세기 후반 유럽에서다. 한 걸음 나아가 전 지구촌 차원에서 기후변화의 위기가 공론장에 올라온 것이 바로 1992년 리우 정상회의였다.

하지만 리우 회의에서 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됐음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의 결과라는 가설을 놓고 과학적 논쟁이 계속됐고, 화석연료 사용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2007)와 파리협정(2015)을 놓고 미국의 공화당 정부가 파행을 거듭하고, 중국은 선진국 책임이라며 딴전을 부렸다. 화석연료 기반의 제조업이 발달한 한국은 국제여론의 눈치 살피며 현실 안주에 급급했다.

이렇게 30년에 걸친 논쟁, 협상, 반성 끝에 지구촌 여론은 올해 파리협정의 정신과 원칙으로 되돌아왔다. 2015년 195개 국가가 참여해 체결한 파리협정은 유엔 산하 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의 권고에 따라 기후변화재앙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구평균기온을 산업혁명 이전을 기준으로 섭씨2도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며, 될 수 있으면 1.5도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는 합의에 기초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대통령, 스가 일본총리를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 원수들이 선언한 '2050년 넷제로'는 바로 파리협정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30년 후의 목표 수치를 정해 놓고 모든 나라가 협력하는 것도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30년 안에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를 전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로 대체해야 이룰 수 있는게 넷제로다. 이게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게 인류의 숙명이다.

지구과학자들은 남극 빙하에 갇힌 공기 샘플을 분석하여 지구 기온변화와 이산화탄소(온실가스) 농도 변화가 시간차만 있었을 뿐 거의 일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5월 27일 하와이 마우나로아 산에서 측정한 이산화탄소농도는 419ppm이다. 산업혁명 이전 농도는 280ppm이었으니 무려 50% 증가했다. 이렇게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간 것은 지난 80만년 동안 없던 일이다. 제6의 멸종이 거론되는 이유다. 제6의 멸종 상정 대상엔 바로 인류가 있다.

한국은 세계 9위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다. 이렇게 많이 배출하면서 세계 10위 경제규모를 키워왔다. 선진국이 그렇게 했고 지금까지 그게 통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빨리 지나가고 있다. 산업이 재편될 것이다. 넷제로의 길을 회피할 수 없다면 힘들어도 앞서 개척해 나가야 한다. 혁신적인 청정기술을 개발하는 나라가 넷제로를 잘 할 수 있고 경제선진국이 될 것이다. 과학계, 산업계, 정부, 정치권, 소비자가 다함께 똑똑하고 현명해져야 할 시점이다. 구체적 실행계획이 보이지 않는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에 야당과 언론이 비교적 얌전하게 지켜보는 것은 국민의 걱정이 깊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인류는 2050년 넷제로를 달성하고 인간의 현명함을 자축할 것인가, 아니면 기후변화의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대며 인간의 우매함을 후회할 것인가. 2021년은 자연과 인간이 새롭게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문명사적 분기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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