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플라스틱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플라스틱 제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그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무모한 도전'이 '위대한 도전'으로 바뀌는 그날을 꿈꾸며. 뉴스1제주본부는 5차례에 걸쳐 '플라스틱 제로'를 위한 각계의 노력과 현장의 목소리 등을 소개한다.
 

'보낸 사람 : 문섬지기'

지난 27일 오후 메일함을 열어 보니 청정 바다로 사랑받는 제주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수중사진들이 와 있었다.

탁한 바다 아래 찌그러지거나 찢겨 나간 페트병들이 켜켜이 쌓이다 못해 나뒹굴고 있는 모습, 페트병·캔·담요·모자·가방·포대자루·낚시줄이 주변 해초들과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 흩뿌려진 수십 개의 납봉돌이 해저를 파고드는 모습까지.

특히 산란장을 감추려고 납봉돌과 거적데기를 작은 굴 앞에 끌어다 놓는 문어 사진에서는 애처로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 베테랑 다이버 김병일 태평양다이빙스쿨 대표(63)가 30년 간 제주 바닷속에서 직접 렌즈에 담아 온 광경들이다.
 

대구 출신인 김 대표는 1991년 제주로 이주했다. 꼭 30년 전이다. 당시 군무원이었던 그의 마음을 흔든 건 6년 전 휴가차 찾은 서귀포항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던 청년들이었다. 그 날 그렇게 불현듯 떠오른 호기심은 운명처럼 그를 제주로 이끌었다.

김 대표는 고민할 것 없이 휴가 때마다 찾았던 서귀포시 문섬 앞에 자리를 잡았다. 문섬은 바닷속 경관이 빼어나고 해양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어 '다이버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그는 이 곳에 작은 스쿠버 다이빙 숍을 차리고 본격적인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제주 바닷속 곳곳을 누비던 그의 관심은 점점 수중촬영으로 옮겨갔다. 3년 간 저축한 돈을 쏟아부어 장비를 구비하고, 뒤늦게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할 정도로 열정이 컸다.

물결 따라 나풀거리는 무지개빛 연산호에 무리지어 힘차게 유영하는 자리돔까지 매 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촬영한 사진만 수만장이다. 1999년에는 일본의 유명 잡지사 '마린 다이빙'이 주최한 수중 사진 공모전에서 1위를 거머쥐기도 했던 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해저를 뒤덮은 쓰레기였다.

김 대표는 "언제부턴가 갑자기 바닷속에 들어갈 때마다 쓰레기가 보이기 시작했다"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다 보니 '다이버가 아니면 누가 줍겠나'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허리춤에 채집망을 차고, 손에 가위를 들고 직접 주으러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새카만 기름이 가득 담긴 20ℓ짜리 말통, 납 봉돌에 오염돼 석탄처럼 변해 버린 모래 더미, 연산호 군락지를 휘감아 버린 100m 길이의 주낙, 더러워진 연안에서 번식해 천연기념물인 해송을 질식사시키는 이끼벌레들까지 그가 본 쓰레기들은 천태만상이었다.

김 대표는 "조류로 쓰레기가 계속 쌓이고 있는 지점에 가 보면 정말 눈 앞이 캄캄할 정도"라며 "그런데 치어들은 여기서 자란 뒤 먼 바다로 나가고, 돌고래들은 여기서 삼시세끼를 해결하잖나. 사실상 해양 생태계가 날로 망가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보다 못한 김 대표는 2014년 동료들과 함께 '문섬47'을 만들기도 했다. 수중 정화작업을 위해 서귀포시에 사는 베테랑 다이버 10여 명을 모은 것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문섬47 회원들은 주기적으로 만나 요즘도 문섬·섶섬·범섬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다.

종종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전복을 따는 것 아니냐', '낮에 봐 두고 밤에 잡는 것 아니냐' 등의 오해였다. 김 대표는 "제 아내가 해녀고, 제 아들이 해경"이라고 웃으면서도 "특정 집단이 독점하고 있는 바닷속은 상황이 상당히 심각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요즘 김 대표는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원 없이 했다는 생각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30년 간 기록한 다이빙 횟수만 1만 번이 넘는다.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기록이다.

그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책임의식을 갖고 관심을 가져야 바다 황폐화를 늦출 수 있다"며 "앞으로는 오랫동안 촬영해 온 제주 바닷속 사진을 책으로 엮어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마지막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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