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제주 중학생 살인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비공개하기로 해 놓고 불과 닷새 만에 기존 입장을 뒤엎어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26일 제주경찰청 등에 따르면 제주동부경찰서는 지난 20일 이번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피의자들의 신상정보 공개 여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법률상 요건에 해당하는지 살펴본 뒤 결정하겠다"며 "현재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법률상 요건은 현행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규정된 4개 요건을 말한다.

첫째,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사건일 것, 둘째,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 셋째,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것, 넷째, 피의자가 청소년에 해당하지 않을 것 등이다.

피의자의 신상정보는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경찰은 법률상 이 4개 요건을 모두 갖춘 특정강력범죄사건 피의자에 한해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심의위) 의결을 거쳐 얼굴과 이름, 나이 등의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검토를 마친 제주경찰청은 브리핑 다음날인 지난 21일 취재진에 '법정 요건 불충족으로 심의위를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범행이 잔인하지 않은 데다 공공의 이익 보다 피의자들의 가족 등이 당할 2차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사흘 뒤인 24일 갑자기 취재진에 '절차에 따라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개최하겠다'는 정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때 경찰은 "이번 사건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피의자들을 구속한 뒤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두 피의자 간 공모관계와 계획범죄에 대한 증거가 추가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경찰의 신상정보 비공개 결정이 알려진 뒤 경찰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모든 법정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는 사건이고, 경찰이 심의위 의결 없이 자의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관련 국민청원에도 2만 여 명이 동의한 상태다.

결국 26일 회의를 열게 된 심의위는 불과 닷새 전 경찰의 비공개 결정을 정면으로 뒤엎는 공개 결정을 내렸다. 심의위에는 외부위원 4명을 비롯해 경찰관 3명도 포함돼 있다.

심의위는 "피의자들이 사전에 범행을 모의하고 범행도구를 구입하는 등 계획적인 범행임이 확인됐고, 성인 2명이 합동해 중학생인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했으며, 그 결과가 중대할 뿐 아니라 피의자들이 범행을 자백하는 등 증거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심의위는 이어 "피의자들의 인권과 피의자들의 가족, 주변인들이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 등 비공개 사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했으나 국민의 알 권리 존중, 재범 방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등 모든 요건을 충족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이에 전문가들은 상당한 우려감을 표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처음에 자기들끼리 뚝딱뚝딱 내렸던 결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경찰 스스로 부랴부랴 인정한 것"이라며 "이는 경찰의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결정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자초한 꼴"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오 교수는 "심의위 회부 기준이 다소 모호하더라도 경찰은 적어도 이번 사건이 특정 피해자를 상대로 한 반복적인 보복범죄였던 점,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중학생이었던 점을 인지했다면 지체 없이 심의위를 열고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경찰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중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는 걸 이해하더라도 절차상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범죄에 대해서는 심의위 의결을 거치는 것을 우선적으로,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시스템 보완이 시급하다"고 했다.

경찰은 이번 신상정보 공개 결정에 대한 후속조치로 별도의 피의자 가족보호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피의자들의 가족 등 주변인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경찰 관계자는 "이와 관련한 모니터링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며 "피의자의 정보를 해킹하거나 가족 등 주변 인물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하는 등의 행위는 형사처벌될 수 있는 만큼 유의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한편 백광석과 김시남은 지난 18일 오후 3시16분쯤 제주시 조천읍의 한 주택에서 중학생 A군(16)을 살해한 혐의로 지난 21일 구속됐다.

경찰은 백광석이 자신과 1~2년간 함께 살며 사실혼 관계였던 A군 어머니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자 앙심을 품고 김시남과 공모해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경찰은 두 피의자가 A군 어머니가 집을 비운 대낮에 주택 뒤편으로 가 몰래 다락방에 침입한 점 등의 현장 상황에 비춰 계획범죄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다.

경찰은 이날 오후 1시쯤 백광석과 김시남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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