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제주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특유의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며 살아 왔다. 2021년 지금도 이 같은 공동체 정신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의인(義人)'이라고 부른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들은 하나같이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뉴스1 제주본부는 제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든 의인들의 당시 활약상과 후일담을 들어본다.
 

“불 끄고 가겠습니다.”

지난 2월27일 오전 8시50분쯤 제주시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앞.

급행버스를 모는 운전기사 김상남씨(55)에겐 보통의 주말 아침과 다름없었다.

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승객 한 명을 싣고 출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출발하려는 순간 시뻘건 불꽃이 김씨의 눈에 들어왔다. 신호대기를 하며 잘못 봤나 싶어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다시 확인했다. 1층 상가 입구쪽에 불이 난 것이 맞았다.

김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를 길가에 세운 뒤 버스 뒷좌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화기가 있었다.

다급히 승객에게 양해를 구한 김씨는 상가로 달려갔다. 소화기로 불을 잡아보려 했지만 예상보다 불꽃은 거셌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소화기 한 통을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불은 뜨거운 화염을 내뿜으며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있었다. 상가 바로 옆에는 주유소도 있어 이대로 있다간 불길이 번져 대형 화재로 번지는 것이 아닌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마침 옆으로 다른 버스 한 대가 지나가자 김씨는 손을 휘저어 멈춰 세웠다. 동료기사에게 소화기를 꺼내 달라 급히 소리쳤다. 그렇게 두 번째 소화기로 큰불을 잡고 잔불이 남았을 때쯤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홀로 불을 끄던 김씨는 소방대원들이 도착한 뒤에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소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기다려준 승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무덤덤하게 물 한 모금 들이켠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상가 주인 덕분에 알려진 활약…"어머님 가르침 덕분"
 

김씨는 8개월 전 그때도 지금도 그날의 행동은 당연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30여 년 버스 운전을 하면서 길에서 크고 작은 사고들을 많이 목격해왔다. 전복사고, 추돌사고 등등 이미 여러 번 사고현장에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어디든 뛰어가던 그였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는 망설임 없는 평소 습관이 그날도 나왔던 것이다.

김씨는 특히 화재사고에 대해선 더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유년시절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다. 이번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누구보다 기뻐하고 칭찬해주셨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께서 불조심을 시키셨다. 혹시라도 집에 불이 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입은 옷이라도 벗어서 꺼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사실 그날 김씨의 활약은 자칫 묻힐 뻔했다. 소방차가 도착하자 홀연히 떠난 그가 회사에도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일해온 탓이었다.

“화재사고도 잘 마무리된 것 같고 해서 회사에 알릴 필요도 못 느꼈다. 상가 주인이 찾아오시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게 3~4일 만에 일이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시끄러워지더라.”

그날의 일이 알려진 건 화재가 발생한 상가의 주인을 통해서다. 사고 발생 3일 후쯤 상가 주인이 버스회사 제주여객을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제서야 회사에서도 버스에 설치된 CCTV 영상을 보고 김씨의 활약을 알게 됐다.

◇상품권·사례금도 모두 기부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일까. 김씨는 그날 이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심이 낯설었다. 사고 직후 여러 언론사, 방송사에서 오는 인터뷰 요청이나 연락은 모두 거절했다.

그런 그가 bhc치킨으로부터 ‘이달의 히어로’ 선정을 받아들인 건 회사 동료의 설득 때문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라는 이야기에 상장과 치킨 상품권을 받았다. 이때 받은 치킨 상품권은 코로나19 시대에 더 힘든 사람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기부단체에 보냈다.

김씨는 상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30만원 상당의 상품권도 기탁했다. 상가 주인은 김씨의 수차례 거절에도 불구하고 감사편지와 함께 사례금을 전했다. 김씨는 이를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이웃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탁했다.

기부 이유를 묻자 그는 “큰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기회가 생기니 조그맣게 기부를 한 것뿐”이라며 “지금은 평범한 버스기사로 살고 있다”고 허허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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