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공을 '헌마공신(獻馬功臣)'이라 부르겠노라."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조정은 전쟁에 쓸 말이 부족해 골머리를 앓았다. 오랜 전쟁으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었던 탓이다.

조정은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가 적은 제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국영 목장에서 차출하는 말 만으로는 그 부족분을 충당하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기르던 말까지 징발하기로 하는데, 여기서 구원투수로 나섰던 게 바로 김만일(1550~1632)이다.
 

1550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태어난 김만일은 경주 김씨 제주 입도조인 김검룡의 7세손으로, 전국 최대의 목장 지대였던 한라산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대목장의 경영인이었다.

김만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594년, 조정으로부터 말을 조달하라는 명을 받자 그 해 4월 기꺼이 말 100여 필을 바쳤다. 당시 좋은 말 한 필이 노비 3명에 버금갈 정도로 값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지원이었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말이 없어 군사들이 걸어 다니고, 하물며 임금과 궁중을 지키는 친위병 중에도 말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상황에서 김만일이 진상한 말 100여 필은 가뭄의 단비였다.

이후에도 김만일은 광해군, 인조 때까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조정에 수백, 수천 필의 말을 바쳤다.

그 공로로 김만일은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포상과 함께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다.

1620년(광해군 12년) 정2품의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데 이어 1628년(인조 6년)에는 '헌마공신' 칭호와 함께 현재의 부총리 직급인 종1품의 숭정대부로 임명되는 등 제주사람으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그다.
 

김만일은 1632년(인조 1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후손들에 의해 대대로 지켜졌다.

김만일의 후손들은 무려 230여 년 동안(1659~1895) 제주산마감목관직을 맡아 산마장을 운영하면서 왕이 타는 어승마와 전마는 물론, 양마 산출에 진력해 국가 전마의 공급처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김만일이 나라에 말을 바쳤을 때부터 무려 300년 간 한 집안에서 국방의 기초인 전마를 도맡아 감당했던 것이다. 마릿 수로는 2만여 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인 공훈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만일의 뜻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사단법인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사업회는 한국마사회와 함께 2017년부터 말산업·문화에 기여한 이들에게 '헌마공신 김만일상'을 수여하고 있고, 그의 고향 의귀리에서는 2016년부터 해마다 '제주의귀말축제'를 열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8월21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을 열고 김만일과 그의 후손들의 업적, 공로 등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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