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택소노미'라는 새로운 제도가 논의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원전문제를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지난 3일 열린 대선후보 4자 TV토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던져서 시중의 화제가 된 질문이다. 그날 토론을 지켜본 수백만 유권자 중에 몇 명이나 그 질문을 이해했을까. 0.1%나 됐을까. 전국민을 상대로 한 TV 토론에서 시청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택소노미(Taxonomy)는 '공통 유형에 따른 분류'라는 뜻으로, 원래 생물학에서 유래된 말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 이외엔 거의 안 쓰는 생소한 단어다. EU택소노미는 유럽연합(EU)이 '2050넷제로'(탄소중립)를 달성하기 위해 2020년에 만든 '유러피안 그린딜'에서 금융 및 투자를 촉진하는 친환경적 녹색활동의 분류 목록을 말한다. 지난해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협약당사국총회(COP26)를 계기로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 EU집행위원회에서 논란이 가열되면서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했다면 시청자들이 이해가 더 쉽지 않았을까.

"유럽연합(EU)에서 원자력을 녹색에너지로 분류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원전문제를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입니까?"

한국의 탈원전 논쟁만큼 유럽연합에서도 원전을 EU택소노미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들끓어왔다. 원자력은 방사능 오염 위험성 때문에 유럽에서 녹색에너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파리기후협정 체결 후 기후변화 대응이 절박해지면서 녹색 에너지로 분류해야 한다는 논의가 유럽연합 안에서 가열되었다. 탈원전을 지향하는 독일은 반대의 선봉에 섰고, 전력의 70%를 원자력으로 생산하는 프랑스는 찬성측의 선봉장이 됐다. 루마니아 등 동구권 EU 회원국들이 프랑스에 동조하면서 찬성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일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조건부 녹색에너지로 인정하는 EU택소노미 보완 위임안(CDA)을 확정하고 27개 회원국에 통보했다. 회원국 정부가 6개월 안에 심의해서 20개국 이상이 찬성하고 유럽의회가 의결하면 내년 1월1일부터 발효한다. 외신이 전하는 것을 보면 EU 집행위원회의 원안 통과가 확실해 보인다.

EU 택소노미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녹색으로 분류된 에너지는 EU 역내 투자에서 금융 재정상 주어지는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원자로나 천연가스 발전소를 건설할 경우 투자 및 금융지원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원자력은 운용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보다도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방사능폐기물이 큰 문제이기 때문에 그 동안 EU에서 녹색에너지로 인정받지 못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원자력을 '전환 에너지'범주에 넣었다. 조건은 신규원전은 자국내 안전한 방사능폐기물 처리시설을 확보한 후 2045년까지 건설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원전도 택소노미 조건에 충족하려면 2040년까지 기준에 부합하는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또 새로운 차원의 기술을 적용한 4세대 원자로, 이를테면 소형원자로(SMR)도 택소노미에 포함된다.

EU 택소노미의 새 보완규정이 채택되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전환기의 에너지로서 원자력뿐 아니라 천연가스 사용이 활력을 얻을 것이며, 원자력 발전 능력을 가진 북미나 아시아 지역의 원자력이 유럽의 선례를 따르면서 르네상스를 맞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환경부가 'K-택소노미'라는 어려운 이름의 녹색활동 분류체계를 마련했다. 여기에 원자력은 빠져있다. 국내 원전 반대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유지만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의 영향인 것이 자명하다.

오는 3월 9일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우선 대두될 현안 중 하나가 지난 5년간 문재인 대통령을 상징했던 '탈원전' 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될 것이다. 야당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탈원전 정책은 폐기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는 "탈원전 백지화, 원전 최강국"을 공약했다. 여당인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도 기존의 탈원전 정책을 온전히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후보는 감원전(減原電)이란 이름의 탈원전 완화정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청와대에 역린을 보이지 않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2050탄소중립'을 선언했고, 작년 영국글래스고 기후변화당사국총회에서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고 2018년 기준으로 탄소배출을 30%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린딜' 프로젝트에 문재인 정부가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재생 에너지의 비율은 7% 내외다. 그것도 스마트그리드 인프라 구축이 되지 않아 귀중한 전기가 공중으로 새어버리고 있다.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탄소중립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건 무리라는 여론이 대세다.

탄소중립의 바람은 이미 2015년 파리기후협정이 체결될 때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문재인 대통령이 탈핵선언을 그렇게 서둘렀는지 또 그 참모들은 미래를 어떻게 읽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취임 때부터 진지한 정책적 고뇌가 필요했던 이슈인데 그러지 않았고 따라서 임기가 끝나기 전에 탈원전 정책은 야당의 반대만 아니라 여권의 회의론에 직면했다.

원자력은 원자로 사고와 고준위폐기물 등 위험을 안은 에너지다. 그러나 기술개발로 위험을 제어하며 전환 에너지의 역할을 맡길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지금 기후위기는 예상을 넘어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단순히 기온이 오르고 바닷물이 불어나는 선형적 변화가 아니라 임계점을 벗어나면 기후체계가 뒤죽박죽되며 인류를 파멸로 내몰지 모르는 비선형적 변화다. 그게 EU택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시킨 고육책이 나온 배경일 것이다.

5월10일 취임하는 22대 대통령은 새 원자력 정책을 전임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처럼 너무 정치적 이벤트로 포장해서 국민을 놀라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 대통령의 원자력 정책이 마치 재생에너지 정책을 파기하겠다는 듯이 달려들어서는 국민을 또 한번 불편하게 할 것이다.

원자력은 핵확산, 핵폐기물, 원자로폭발 등 만만찮은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은 원자로 밀도가 세계 최고의 나라다. 원자력 정책 입안자나 집행자들은 그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나 폐기물 저장소 근처에 거주할 수 있다는 각오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보다 안전한 핵에너지 기술, 즉 소형원자로와 핵융합 기술 투자에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후변화시대에 에너지 정책은 대통령이 우선 챙겨야 할 현안이다. 먹고사는 문제와 국민의 안전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토대, 국민적 수용태세, 국제적 공감대 등 3자가 조화를 이루는 에너지 배합(MIX)모델이 나오길 기대한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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