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2277원', 대통령 선거일인 지난 9일 서울의 어느 주유소의 가격 표시판에 뜬 숫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산 원유 및 가스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원유값이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29달러로 폭등했고 그 불똥이 하루만에 한국 소비자들에게 옮겨붙은 것이다. 원유값이 2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예측이 뉴욕 상품선물거래소에서 나온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방아쇠를 당기면서 촉발한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보름 이상 계속되면서 지구촌의 경제와 안보 환경이 정신없게 요동치고 있다.

면적이 한국의 6배나 되고 인구 44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는 2차세계 대전 이후 유럽 최대 지상전의 전장으로 변했다. 러시아의 육군 해군 공군의 파상 공격으로 아파트와 학교가 파괴되고 피난민이 줄을 잇고 있다. 유엔의 집계에 의하면 이웃 동구권 국가로 피신한 난민이 120만 명이 넘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폭격의 폐허에서 부상한 가족을 안고 울부짓는 사람들, 지하실에 피신한 사람들의 불안한 모습들,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피난열차를 기다리는 긴 난민 행렬이 그저 남의 나라 일만 같지 않다. 70여 년 전 한국전쟁의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도 사실상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에너지 값 폭등으로 전방위로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일상생활을 옥죄고 있다. 푸틴은 미국의 러시아산 에너지수입 금지조치에 반발해서 "러시아 상품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맞대응으로 나왔다. 이제 서방국가와 러시아는 자원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국토면적이 거의 미국의 2배에 이르는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와 비슷한 원유생산량을 갖고 있으며 천연가스 1위 수출국이다. 또한 광물자원과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이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온실가스를 덜 배출한다는 이유로 천연가스 소비량의 40%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이제 유럽 국가들도 미국에 동조하여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단계적으로 줄일 뜻을 밝히면서 국제 에너지 가격은 예측할 수 없게 요동치고 있다.

푸틴의 전비조달 돈줄을 끊겠다는 나토 동맹국들의 행동이 단기간에 효과를 발휘해서 푸틴이 전쟁의지를 약화시킨다면 다행이지만,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세계 경제는 혼란의 터널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전기차 배터리 제작에 필수 금속 소재인 니켈 값이 하루밤 사이에 44% 폭등한 것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이다. 특히 인구 1억4000만명의 러시아는 자동차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소비재를 팔아온 무역파트너로서 한국기업이 고스란히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될 판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의 안보환경이 극도의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서 나토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수물자 지원을 하고 있다. 특히 냉전해체 후 러시아에 유화적이었던 독일의 숄츠 총리는 우크라 침공에 경계심을 갖고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등 전쟁물자를 제공할 뿐 아니라 국방예산을 GDP의 2%까지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핵강대국 사이에 금기처럼 여겨지던 핵무기 사용 준비태세를 공공연히 언급했다. 미국은 이를 애써 무시했지만 푸틴의 핵무기의 언급은 당장 북한의 핵무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뿌리는 15개 공화국으로 해체로 된 1991년 냉전붕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전쟁의 발단은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과거의 지배력을 회복하겠다는 푸틴의 야욕이 빚어낸 결과다. 2000년 옐친의 후계자로 러시아 대통령이 된 푸틴은 22년간 사실상 차르(러시아 황제)처럼 전제정치를 펼쳐왔으며 2030년대까지 장기집권을 꿈꾸고 있다.

이런 푸틴에게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우크라이나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눈엣가시다. 2000년대 초반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과 조지아의 '장미혁명'은 러시아에 시민혁명의 불을 지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푸틴은 군대와 경제력을 동원하여 탑압했다. 푸틴에게도 고민은 있다. 냉전 해체 후 나토는 계속 동진하여 과거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폴란드와 발트해 3국 등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자칫 모스크바의 앞마당인 우크라이나가 나토 동맹국이 될지 모른다는 안보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와 나토의 직접충돌은 원치 않지만 푸틴의 전비조달을 봉쇄하기 위해 러시아를 최대한 압박하고 있다. 과거 수많은 전쟁이 정치적 갈등뿐 아니라 경제적 봉쇄로 터졌던 사례를 곱씹어 볼 때 극도의 제재에 견디지 못한 푸틴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 없다. 미국의 정보력이 이를 간파하겠지만 일단 전쟁상태에서 푸틴의 자기제어능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국이 전에 없이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 달 4일 서방 국가 지도자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푸틴 대통령이 참석하여 시진핑 중국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관계에 제한은 없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는 등 특별한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푸틴은 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크라이나 침공을 늦추다가 성화가 꺼진 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배려를 했다.

미소 냉전 시대에 중국과 소련은 서로 반목했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미중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갈등을 서방에 유리하게 이용했다. 50년 후 상황은 반전되어 G2 경제력으로 부상한 중국과 막강한 핵전력을 가진 러시아가 미국을 유럽과 아시아에서 밀어내기 위해 공조체제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시진핑도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조항을 없애고 1인독재체제를 영구화하려 하고 있다. 푸틴이나 시진핑이나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질서를 바꾸려고 공동전선을 펴게 될 것 같다. 특히 시진핑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제 대놓고 비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전제정치 연대는 주변국가 특히 동아시아에서 큰 지정학적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문제와 대만 문제가 민감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이 국제 평화질서를 주도해 나가던 '팩스아메리카나 시대'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5월10일 취임하는 윤석열 정부가 맞게 될 국제정치 환경이 참으로 냉혹하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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