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원심 판결의 무죄 부분을 파기하고 피고인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지난 17일 광주고등법원 제주 제1형사부(재판장 이경훈 부장판사)가 23년 전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조폭 출신 김모씨(54)에게 내린 주문이다.

6개월 전인 지난 2월17일 김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당시 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의 판결을 뒤집는 판단이었다.

문제의 살인 혐의는 김씨가 제3자의 사주로 동갑내기 조폭인 손모씨(2014년 사망)와 공모해 1999년 11월5일 새벽 제주시의 한 노상에서 손씨로 하여금 흉기로 검사 출신 변호사인 이모씨(당시 44세)를 세 차례 찔러 살해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직접 증거는 없다. 원심 재판부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여러 간접 증거를 종합할 때 범행 당시 피고인이 적어도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갖고 있었다고 봤다. 이씨가 숨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뭘까.

◇"공소시효 끝난 줄 알고"…제 발목 잡은 자백 인터뷰

항소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피고인 진술에 주목했다.

김씨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피해자를 손 좀 봐주라는 지시를 받고 손씨와 상의한 끝에 손씨가 흉기로 상해를 가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일이 잘못돼 피해자를 살해해 버렸다"는 취지로 말한 진술이다.

김씨는 당시 지인을 통해 제작진에 자신이 제주 변호사 살인사건에 관여했다는 취지의 제보를 했고, 이후 이를 접한 제작진과 2019년 10월7일 1시간 동안 통화를 한 데 이어 같은달 10일 캄보디아에서 5시간 동안 영상 인터뷰를 했다.

이 때 김씨는 적어도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진술했고, 특히 이씨를 미행한 사실과 이씨를 미행하면서 알게 된 정보, 범행 현장 상황, 손씨가 이씨를 흉기로 찌른 부위, 사용된 흉기의 특징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이 뿐 아니라 김씨의 진술 중에는 사건 발생 당시 보도되지 않았거나 수사기관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정에 관한 것들도 있었는데 대체로 타당했다.

증인들의 증언도 김씨의 진술을 뒷받침했다. "김씨가 2014년 10월 마카오에서 손씨의 사망소식을 듣고 괴로워하며 '당시 손씨와 함께 변호사 사건을 했다'고 말했었다"는 동거녀의 진술, "2014년 4월부터 11월 사이 김씨가 술자리에서 '손씨는 무덤까지 같이 갈 소중한 친구였다. 공소시효를 얼마 안 남기고 자살했다'고 말하며 머리를 감싸고 운 적이 있는데 이 때 김씨가 공소시효 만료일와 손씨의 사망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는 지인의 진술이 그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믿은 피고인이 금전적 이득 등을 목적으로 제작진에게 자발적으로 접촉해 적극 진술한 것"이라며 "여러 사정에 비춰 보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별 제작된 흉기·뒷조사 정보 보고…그는 알고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김씨가 살인죄의 공동정범임을 피할 수 없는 여러 사정도 언급했다. 공동정범이란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공동으로 실행한 사람을 말한다.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김씨는 제3자로부터 '이씨를 손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통상 조폭들이 그러하듯이 흉기로 다리 한 쪽이 불편할 정도의 상해를 가하라는 지시로 받아들였다.

이 때 김씨는 이례적으로 제3자로부터 3000만원 지급도 약속받았는데 항소심 재판부는 "적어도 김씨가 제3자의 사주에 따라 손씨에게 흉기를 이용해 장애를 초래하는 수준의 상해를 가하는 범행을 지시·의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씨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의 형상이나 제작방법 등을 자세히 진술한 점, 또 김씨와 손씨 모두 상당 기간 조폭으로 활동하면서 싸움 도중 조폭이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 점도 중요 포인트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당시 김씨는 손씨가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흉기를 범행에 사용할 것이라는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또 흉기를 사용한 범행의 경우 의도와 달리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결과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김씨가 범행에 앞서 두 달간 미행과 뒷조사를 벌인 손씨로부터 이씨 관련 정보를 전달받고 이를 토대로 심야시간 인적이 없는 장소에서 피해자가 귀가하는 때를 노려 범행이 실행된 점, 손씨가 범행 후 김씨에게 이씨가 사망한 사실을 알렸고 이에 김씨가 손씨에게 3000만원을 지급한 점도 주목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결국 김씨가 범행을 모의·실행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손씨의 행위로 이씨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나 예견을 하고 이를 용인하며 기능적 행위지배를 통해 실행행위를 분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징역 1년6개월→13년6개월 선고에도 담담…상고할 듯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 "죄책이 무겁고 피해 결과가 중하며 사회적·도덕적 비난 가능성도 매우 높다"며 "범행 당시 피해자가 느꼈을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유족은 앞으로도 피해자를 잃은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이 같은 판결에 형량이 기존 징역 1년6개월(협박 혐의)에 징역 12년(살인 혐의)이 더해져 징역 13년6개월로 늘어났음에도 김씨는 선고공판 내내 담담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향후 김씨가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원심에서 협박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돼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음에도 원심의 양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며 항소를 제기했던 그다.

상대적으로 검찰은 고무적인 분위기다. 검찰은 선고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김씨가 상고하면 적극 대응하고, 김씨에게 살인 범행을 지시한 배후에 대해서도 추가 수사를 벌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은 증거 산일, 실행범 자살 등으로 자칫 미궁에 빠질 수 있었음에도 검경의 적극적 수사와 검찰의 공소유지로 실체적 진실을 밝힌 사안"이라며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 사건은 2014년 11월4일 공소시효 만료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으나 6년 뒤인 2020년 6월27일 방송을 통해 김씨의 자백 취지의 인터뷰를 접한 경찰이 재수사에 들어가면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결국 김씨는 지난해 6월23일 캄보디아 현지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적발돼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 검경은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형사소송법 제253조를 들어 김씨를 수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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