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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서경배과학재단 '서광차밭' 호흡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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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이웃 마을 서광은 곶자왈 사이사이 메밀이나 감자를 심는 척박한 중산간 마을이었다. 곶자왈은 요즘 제주도에선 보물과 같은 녹지대이지만 40년 전만 해도 염소나 놓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80년쯤인가. 이곳 마을 주변에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의 어떤 부자가 곶자왈을 개간하여 차밭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차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네 농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농사도 못 짓는 돌투성이 땅에 뭘 심으려고. 돈이 많아 쓸 데가 없는 모양이야.”

지금 그곳은 내외국인이 연간 150만 명 이상 몰려드는 제주도의 대표적 관광지가 됐다. 중국어가 한국말보다 더 많이 들리고, 녹차 아이스콘 한개를 사먹으려는 줄이 길게 이어진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차밭은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곳이다. 오설록 서광다원(西廣茶園)의 오늘날 모습이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하여 ‘서경배과학재단’을 만든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서광차밭이다. 차밭을 개척한 서울 부자가 바로 서 회장의 선친 고 서성환 회장이어서다.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 전신) 최고경영자였던 서성환 회장이 당시 차밭을 만들 때만 해도 오설록 서광다원의 현재 풍경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목가적 꿈을 지니고 차나무를 긴 호흡으로 심고 가꾸지 않았을까.

서경배과학재단의 철학과 운영 원칙은 서경배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몇 마디 속에 잘 표현돼 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 9월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서경배 과학재단’ 설립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모레 퍼시픽 제공)2016.9.1/뉴스1
“생명과학 기초 분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혁신적 과학자의 연구를 장기적으로 돕겠다.” “매년 3~5명의 과학자를 선정하여 각 과제당 5년 기준으로 최대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겠다.”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소망을 이루고 싶다.” “재단이 지원한 연구자가 노벨상을 받는 영광의 순간에 함께 있고 싶다.”“아모레퍼시픽과 관련된 (단기적)연구는 하지 않는다.”

서경배 회장의 긴 호흡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재단의 재원을 만들어준 아모레퍼시픽 기업과 관련된 연구는 하지 않겠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발전시키겠다는 그의 신념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민간재단을 만든 사례는 우리 사회에 수없이 많다. 갖가지 이름의 문화재단, 장학재단이 출몰했고 그때마다 뒷말도 무성했다. 뒷말의 배경은 대개 변칙상속과 세금회피 등 재산관리의 수단으로 민간재단을 만드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그럼에도 재단은 일단 설립되면 공익 우선 등 법적 규제를 받으며 부의 사회환원이라는 긍정적 창구 역할을 어느 정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민간재단 활동은 돈을 출연하는 사람의 철학과 운영스타일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특히 돈은 참으로 요망스러운 존재여서 물주가 정신을 놓으면 재단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21세기 들어 부자가 만든 민간재단의 세계적 모델은 2000년 설립된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일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해 IT기업 시대를 열었다. 록펠러 이후 가장 돈을 많이 벌었다는 빌 게이츠는 자신의 재산과 워런 버핏 등 다른 부자들의 기부를 합쳐 440억 달러의 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아프리카 등 세계 저개발 지역을 대상으로 빈곤 문제해결, 여성과 소녀의 지위향상, 말라리아 등 질병 퇴치를 위한 과학기술연구 등의 사업을 펼친다. 이런 일을 위해 유엔 등 국제기구와 협력도 벌이고 있다.

빌 게이츠는 2007년 여름 그가 중퇴한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자의 영예를 안았는데, 그의 연설은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게이츠는 이 연설에서 "미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질병으로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이 한해 수백만명씩 죽어간다"며 "이런 인류의 절박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하버드 졸업생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로벌 차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창한 것이다. 이런 주장에 맞게 그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재단사업을 통해 다보스포럼 등 국제적 의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서경배회장도 과학재단을 만들면서 게이츠 재단을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서 회장도 일단 3000억으로 시작하지만 재단을 1조원 규모까지 키울 예정이다. 아모레퍼시픽이 더욱 번창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 그의 말마따나 생각이 같은 부자들이 모이면 게이츠재단처럼 기금 규모를 획기적으로 키울 수도 있다. 한국에서 부자가 부자의 재단에 기부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서경배과학재단의 수혜자는 잠재력 있는 소수의 과학자로 한정될 것이다. 그래서 장학금을 수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 흔한 장학재단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경배 회장이 기자회견서 밝힌 초심을 이어간다면 그의 과학재단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기구로 우리나라와 인류에 공헌할 것이다.

기초과학은 우리나라같이 단기성과만 추구하는 연구 분위기에서는 발전하기 힘들다. 한국 사회는 어느 분야나 냄비처럼 끓다가 빨리 식는다. 과학 분야도 은연중 이런 사회적 정서에 물들어 있다. 교수 자리, 연구원 자리, 단기 정부프로젝트, 연구비 따먹기가 기성 과학 기술계를 지배하는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서경배과학재단 역시 빛좋은 개살구가 될 수밖에 없다. 창립자의 뜻과 재단 운영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지속가능하면서 투명하게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서경배 회장의 긴 호흡이 한국 기초과학의 긴 호흡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뉴스1 고문>

  jus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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