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희생자 故 김창욱씨 암매장 유해 신원 확인
"母 기일전 父 유해 찾아…68년 만에 한 풀었다"

여느 날과 같이 제주의 한 농촌에서 가을걷이를 하고 있던 김태홍씨(70·서귀포 신평리)는 지난 12일 문득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 68년 간 애타게 찾아 헤맸던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김씨의 입에선 "아!"하는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올해 4월부터 진행돼 온 4·3희생자 발굴유해 유전자 감식을 통해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아버지 故 김창욱씨(1919년생) 유해에 대한 신원이 확인된 것이었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의 그리움을 하염없이 눈물로 쏟아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 하루 전날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 찾았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948년 6월 13일 당시 2살이었던 김씨는 어머니와 2살 터울 누나, 어머니 뱃속의 동생과 함께 서귀포시 모슬포의 한 사찰 창고로 향했다. 전날 가족들을 다 데려와야 면회할 수 있다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연락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가족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아버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에선 사찰 창고에 갇혔던 동네 청년들이 무장대에 끌려갔다는 말이 오갔다.

그렇다고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장대가 곳곳에 불을 질러 일순간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등 공포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잠잠해 지자 김씨 가족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섰지만,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아버지의 얼굴도, 생사도 모른 채 울며불며 68년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아버지 제사는 제주도 곳곳에서 치러졌다.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평화공원, 서귀포시 모슬포에 있는 백조일손지묘,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북부 예비검속위령비까지. 김씨는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고 했다.

2010년에는 4·3 당시 '정뜨르비행장'으로 불렸던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기도 했다.

당시 김씨는 이곳에 아버지의 유해도 함께 묻혀있었을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돈이 없어서 유전자 감식을 못 한다"는 황당한 답변 뿐이었다. 2010년 이후부터 4·3희생자 유해 유전자 감식 사업에 국비가 일체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 제주도가 2014년부터 지방비를 투입해 유전자 감식을 진행하면서 올해 가까스로 김씨의 아버지, 故 김창욱씨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게 됐다.

故 김창욱씨의 유해가 발견된 곳은 1949년 10월 군법회의 사형수들을 정식 재판 없이 총살해 암매장한 곳으로, 현재까지 이곳에서는 총 261구의 유해가 발굴된 바 있다.
 

시간이 더 지체돼 유전자 감식을 위한 유해 시료가 자연분해됐다면 김씨는 아버지를 영영 찾지 못할 뻔 했다.

김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인 이날 오후 모슬봉에 있는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 큰 절을 올리며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어 그는 매해 온 가족과 함께 아버지가 계신 제주4·3평화공원 위패 봉안실을 찾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김씨는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같다. 내 나이 70에 아버지를 찾았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면서, "아직도 4·3 때 스러진 시신 몇백구가 땅에 묻혀 있다. 유가족들을 위해 작은 뼛조각 하나라도 찾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제주도는 올해 4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진행된 '4·3희생자 발굴유해 유가족 찾기 유전자 감식 사업'을 통해 故 김창욱씨를 포함, 총 유해 3구에 대한 신원을 확인했다.

이 사업으로 지난 2006년부터 지금까지 총 4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으며, 현재 이에 대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 중 92구가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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