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엔 배기통이 없다. 연료는 휘발유나 경유가 아니라 배터리다. 온실가스 배출도 없고 미세먼지도 안 나온다. 당연히 엔진 소음도 없다.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심리적 압박감은 있다. 남아 있는 주행거리가 디지털로 표시되는 계기판에 신경이 쓰인다.

발명된 지 100년도 더 됐지만, 전기차는 전 세계 운행 차량의 0.01%도 안 된다. 지난 20세기 동안 내연기관, 도로교통 체계, 연료보급 인프라, 법제도 등 자동차 문명의 틀이 휘발유나 경유에 흠뻑 빠져 있다. 화석연료 기반의 자동차 문명을 지배해온 건 소수의 메이저 석유회사와 자동차 메이커들이다. 그들은 세계인을 100년 이상 휘발유나 경유 자동차의 틀 속에 묶어 놓았다. 석유회사도, 자동차메이커도, 소비자도 이 틀에 안주했다. 바뀌는 게 싫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전환점에 있다. ‘파리협정’이 지난 4일 발효한 까닭이다. 작년 12월 파리에서 195개국 대통령과 총리가 21차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1)를 열고 합의한 게 파리협정이다. 산업혁명 이후 늘어나기만 하는 화석연료 사용량을 그냥 두면 기후변화의 재앙은 피할 수 없다, 기후변화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산업혁명 이전보다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이상 더 못 오르게 막아야 한다, 가능하면 1.5도 이상 상승하지 못하게 막는 게 좋다, 그러려면 화석연료 사용을 규제해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파리협정의 요체다.

파리협정 발효는 전기차시대의 공이 울린 것과 같다. 이제 각국 자동차 정책은 온실가스가 배출되지 않은 전기차나 수소차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 자동차회사 경영자의 머릿속에서도 전기차를 배제한 경영전략이 나올 수 없으며, 자동차 구매자도 전기차를 선택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전기차의 기술혁신과 소비 증가의 속도가 빨라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전기차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기업은 테슬라이고 국가는 중국이다. 테슬라를 설립한 엘런 머스크는 자동차산업 개념을 기계공학에 바탕을 둔 디트로이트형(型) 제조업에서 실리콘밸리형 전자산업으로 바꿔놓고 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전기저장장치(ESS), 태양광 등을 포괄하는 에너지 시스템 혁명의 비전을 갖고 있다.

중국은 ‘전기차 선진국’의 꿈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에 미국과 독일 등 서방 자동차 국가를 쫓아가는 후진국이었지만, 기후변화라는 산업적 전환기를 맞은 지금 전기차 개발과 보급에서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비전과 전략을 갖고 있다. 전기차의 생산 및 보급, 그리고 충전인프라 구축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행정적 재정적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 결과 작년 중국은 전기차 보급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BYD를 거대한 전기차 및 배터리 산업의 선두 기업으로 키워 놨다.

근년에 전기차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판매도 급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연간 세계 자동차 총 판매량에서 차지하는 순수전기차(EV)의 비율은 아직 1%도 안 된다. 파리협정 발효가 계기가 되어 전기차 판매는 상승 탄력을 받을 것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2025년 전기차의 판매 점유율이 30%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전기차는 지금 화두가 되고 있는 자율주행차 및 인공지능과 융합되면서 자동차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전기차 보급엔 두 개의 장애물이 있다. 첫째 주행거리이고, 둘째가 충전인프라 시스템 구축이다. 배터리 주행거리 향상은 자동차 메이커와 배터리제조사의 기술혁신으로 돌파해야 하고, 충전 인프라는 정부 정책의 몫이다.

배터리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지난달 열린 2016년 파리모터쇼는 전기차의 주행거리 성능이 돋보인 행사였다고 한다. BMW가 1회 충전 주행거리 390㎞의 i3모델을 선보였고, 르노의 새로운 전기차 모델 ‘조에’의 주행거리는 400㎞로 주목을 받았다. 주행거리 345㎞의 테슬라 ‘모델3’가 내년 하반기 시판 예정이어서 이제 세계 시장에서 주행거리 150~200㎞의 전기차는 퇴조할 전망이다.

놀라운 일은 최근 독일 의회가 2030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등록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휘발유와 디젤 자동차를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혁명적인 조치로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독일 자동차 메이커들이 이제 휘발유차가 아니라 전기차로 승부를 벌이게 된다는 얘기다.

한국의 전기자동차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올해 환경부는 대당 약 2000만원의 보조금(지자체 보조금포함)을 책정하고 전기차 8000대 보급목표를 세웠으나 지지부진한 상태다. 현대자동차는 주행거리 190㎞의 전기차 모델 ‘아이오닉’을 내놨지만 소비자 반응은 시원찮다. 전기차에 관한 한 정부의 보급정책이나 메이커의 기술개발은 많이 더디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미 한국 자동차 시장에 큰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10월 국내 자동차 판매에서 현대·기아차의 점유율이 58.9%로 떨어졌다. 자동차 관계자들은 충격적으로 보고 있다. 파리협정이 발효한 것도 그렇고, 미세먼지에 대한 국민적 민감성이 높아진 것을 염두에 둘 때 전기차 소비에서도 국산차와 외제차의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다. 테슬라가 곧 국내에 상륙하고, GM은 1회충전 주행거리 383㎞의 전기차 모델 볼트(Volt)를 내년 상반기 시판한다.

지금 한국 정치는 대통령의 권능이 무력화된 카오스 상태다. 이 혼돈이 정치뿐 아니라 산적한 국가 현안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판이다.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국정 혼돈과 경제정책의 방황은 계속될 것이다. 전기차 정책은 산업과 환경이 정교하게 결합된 국정철학이 필요한 분야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 정치 혼돈의 구름이 걷히고 나면 시기를 놓쳐버린 국정 의제들이 많이 드러날 것이다. 전기자동차 분야도 그중 하나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기후변화는 물론 당장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전기차 보급이 늘어나는 게 좋고, 이왕이면 국산 전기차가 잘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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