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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빛의 벙커’와 제주도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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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형 미디어 아트’. 척 보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올해 제주도 성산포에서 관광객을 뜨겁게 끌어들이는 ‘빛의 벙커: 크림트’ 전시의 홍보 문구다. 구스타프 크림트란 화가의 이름은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 ‘키스’는 화가의 이름보다 훨씬 인상에 남아 있다.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작년 11월 ‘빛의 벙커’ 개관을 알리는 신문과 TV 보도를 보며 “제주도에 누군가 또 볼거리 하나를 만들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인데, 지난 2월 하순에 모임에 휩쓸려 별 생각 없이 이 땅굴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음악과 빛이 기묘하고 현란하게 융합하며 만들어내는 크림트의 그림 쇼를 1시간 보았다. 그리고 몰입형 미디어 아트의 뜻을 체험했다.

음향과 냉난방 시설이 설치된 천장을 제외한 900평 공간의 벽면과 바닥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각 기둥이 모두 벽화로 변했다. 사람들은 서서 구경하기도 하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간단없이 바뀌는 이미지에 넋을 잃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여자 관객도 있었다. 관객과 그림과 음악이 융합되는 것 같았다.

미술 작품의 원형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쇼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나 보통 관광객에겐 재미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미술관으로 만든 시설이 아니라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시설에서 크림트 작품을 몰입해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벙커를 나오면서 문득 ‘뮤지컬 한 편 본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 고흐의 별과 해바라기 그림을 이 굴속에서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빛의 벙커는 일본, 한반도, 제주를 잇는 해저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국가통신망 기지였다가 폐기된 시설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한 것이다. 큰물뫼오름(大水山峰) 비탈에 길이 100m 폭 30m 높이 5.5m의 거대한 콘크리트 벙커, 통신망 기지가 1990년 비밀리에 건축됐고, 완공 후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평범한 오름으로 위장되었다. 주변은 과수원과 돌무더기 야산이어서 농부들이 밭일을 하러 가끔 지나쳤을 뿐 벙커 입구에 군이 주둔하며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서 주민들도 거의 모르는 곳이었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그 아이디어와 기술이 프랑스에서 왔다. 2012년 프랑스 남부 레보드프로방스 지역의 폐 채석장을 개조해 ‘빛의 채석장’이란 이름으로 첫선을 보여 성공했고, 작년 4월 파리의 폐기된 철제주조공장에 ‘빛의 아틀리에’를 만들어 일약 명소가 됐다. 성산포의 ‘빛의 벙커’는 세계 3번째 전시관이다.

‘빛의 벙커’를 보며 제주도를, 그리고 성산포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벙커 입구를 나와 10분만 걸으면 옛날 봉수대가 있던 큰물뫼오름 정상에 도달한다. 성산포가 아름답게 보이는 해발 137m의 봉수대는 바로 올레길 2코스가 통과하는 곳이다. 빛의 벙커를 보는 사람과 올레를 걷는 사람이 교차하는 곳이니, 장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빛의 벙커로 들어가는 찻길은 완전 옛날 농촌 들길 그대로다.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 화산암으로 쌓은 돌담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곳의 5월은 신록과 검은 돌담이 이루는 특유의 제주도 색깔이다. 몰려드는 차량과 관광객들을 정리하느라 알바 학생들이 종일 분주히 움직인다.

이런 생각이 든다. 동네 가게 주인들이, 이장이나 면장이나 마을개발회장이, 또는 서귀포시장이나 도지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것만 같다. 길을 반듯하게 만들어 교통을 편하게 하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근 큰길가에는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성산포 읍내는 물론 바닷가에도 호텔과 고층빌딩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제발 큰물뫼오름에는 빛의 벙커만 있고 근처 길가엔 주민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가게만 있으면 좋겠다. 카페나 피자집도 그랬으면 좋겠다.

제주도청 홈페이지를 보니 제주 인구가 69만 명이 넘었다. 낮의 제주도는 콘크리트 빌딩의 경연장 같고, 밤의 제주도는 빛의 경연장 같다. 제주도가 얼마나 무절제하게 팽창하는지 알 수 있다. 이제는 제주도민도, 구경 온 서울 사람도 마음이 여유로워지게 개발이 절제되고 순화되었으면 좋겠다. 비어 있는 옛 건물과 시설을 멋있고 알차게 쓰는 지혜가 아쉽다.

‘빛의 벙커’ 안은 현란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해도 땅 밖으로 나오면 구불구불한 과수원 돌담길을 걸으며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어 아직은 좋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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