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76번 째 광복절 기념일인 지난 15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블에서 벌어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46년 전 월남패망을 상징했던 '사이공 최후의 날'을 떠올리게 했다.

탈레반 세력에 의해 삽시간에 점령된 수도 카블을 탈출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항 활주로에 몰려들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트랩에 기어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6·25전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피난 열차를 연상케했다. 활주로를 향해 이동하는 대형 미국 군용기를 에워싸고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동체와 날개에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광경은 목불인견이었다.

미국의 군사 작전에 의해 지탱해오던 아프간 정부의 종말은 예상됐던 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14일 병력 일부의 주둔 연장을 주장하는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의 건의를 무시하고 9월 11일 완전 철군을 밝혔다. 몇 년 더 버틴다고 미군 희생자만 늘 뿐이지 달라질 게 없다는 논리였다. 자신을 포함해서 4명의 대통령이 짊어졌던 아프칸 전쟁의 짐을 "5번째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말로 철군에 대한 각오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일 탈레반에 의해 아프간 대통령궁이 전격 점령되자 백악관도 아연하고 말았다. 9·11테러 20주년을 맞는 9월 11일에 맞춘 철군 일정이 헝클어진 것이다. 한 달 전 바이든은 기자회견에서 '사이공 함락'을 떠올린 기자의 질문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사실상 굴욕적인 탈출의 오명을 안게 됐다.

미국 부시 정부는 9·11일 테러의 배후로 탈레반 정권을 지목하고 2001년 10월 7일 대대적인 공습으로 아프간 전쟁을 시작했고 그해 12월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 과도 정부를 세웠다. 미국은 20년간 830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30만 아프간 군대를 훈련시키고 현대적인 장비를 지원했다. 다시는 아프간이 테러 온상이 되지 않도록 자위능력을 갖추게 하는 게 미국의 전략이었다.

아프간은 미국이 소망하는 대로 될 수 없었다. 정부는 부패했고 군인은 월급이 몇 달씩 밀리면서 사기가 떨어졌다. 탈레반의 세력이 지방을 석권하며 카불을 옥죄어 오자 탈영병이 속출했다. 15일 탈레반 무장세력이 수도에 입성하자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각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아프간 정부가 얼마나 허약한 체제였는지가 사후에 드러난 셈이다. 한마디로 20년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린 꼴이니, 미국에겐 월남전 패망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아프간은 한반도와 일본을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국토에 인구 약 3100만 명이 사는 회교국가다.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이자, 또 중앙아시아의 남북을 가르는 회랑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지난 200년간 강대국의 세력 확장 게임으로 그 국민의 고통은 컸다. 19세기 초엽엔 대영제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고 아프간을 점령했고, 1979년 소련은 아프간을 점령해서 공산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은 영국도 소련도 이제 미국까지도 아프간의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무덤'이라는 아프간의 별칭이 실감나게 들린다.

탈레반이 미국을 쫓아내고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은 장차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탈레반은 극단적인 회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정치집단이다. 과거 정권을 잡았을 때 여성에게 히잡(머리수건)을 강제하고 혼자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극도의 여성차별정책을 썼고 인권을 억압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바미얀 석굴을 파괴하는 등 타 종교에 대해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장차 탈레반 세력이 아프간 국민을 평화롭게 먹여살리는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유엔안보리 회의도 이 점을 염려했다.

하지만 세계의 관심은 미국의 철수로 생긴 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세력판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쏠려 있다. 아프간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세계 최대 양귀비 생산지로 마약 밀수의 본원지다. 게다가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의 온실 노릇을 해왔다. 분쟁과 테러의 씨앗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실패한 것을 보고, 미국과 척을 지고 있는 중국, 러시아, 이란은 고소해할 것이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견제에 직면한 중국은 미국이 비운 이 지역 힘의 공백을 차지할 기회를 잡으려 부심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고대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듯이 중국의 21세기 패권전략, 즉 '일대일로'의 길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마냥 미소지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가 '신장 위구르 이슬람'의 반중국 독립 정서다. 중국정부는 위구르 자치구 회교도의 이런 움직임을 강제노역과 강제낙태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위구르 자치구가 바로 중국과 아프간의 국경선을 이룬다. 초록은 동색이다.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탈레반 정부가 위구르 회교 운동을 직·간접으로 지원하는 날이 온다면 중국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미군 철수일정이 구체적으로 나오자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서둘러 탈레반 2인자를 텐진으로 초대하여 이 문제를 협의했다. 중국 외교부의 발표문은 완곡한 외교적 표현이 가득했지만, 왕이 부장은 위구르 회교도의 반중 운동을 지원하는 일이 없기를 요구했고 탈레반 지도자는 아프간 경제재건에 중국의 원조를 요구했다. 발표문에는 중국의 만족스러움이 묻어났다. 정부를 출범시켜야 하는 탈레반 지도부는 중국의 돈과 국제정치적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손을 털고 나온 미국은 중국에 힘의 공백을 내준게 아쉽기만 할까? 어쩌면 바이든 대통령은 마음 한구석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서방국가들, 중국, 러시아 모두 알카에다 같은 폭력세력의 준동은 걱정거리다. 미국의 영향력은 현저히 떨어질테지만 혼자 떠맡다시피 해서 자원을 쏟아붓던 테러문제를 국제사회에 상당 부분 떠 넘긴 셈이다. 어쩌면 미국의 테러 문제 대응에 유럽국가의 협력을 더 쉽게 받아낼지도 모른다. 미국은 위구르 회교도의 인권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며 중국에 대한 국제적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다.

아프간이 또 하나의 '제국의 무덤'이 될 것인지, 아니면 '중국 팽창의 교두보'가 될 것인지 21세기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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