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세계의 보물섬, 국제자유도시, 세계자연유산…당신은 제주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제주는 전국민의 이상향이지만 때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제주는 지리적 특성상 타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풍습과 문화, 제도, 자연환경 등을 지녔다. 뉴스1 제주본부는 제주와 관련한 다양한 궁금증을 풀어보고 소개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제주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독자의 제보도 받는다.
 

제주시 원도심에는 '홍랑(洪娘·홍씨 아가씨)'이라는 이름의 작은 길이 있다.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어 희생적인 사랑을 하다 간 홍윤애의 무덤터가 있는 곳이다.

1940년 이 일대에 학교가 들어서면서 그의 무덤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옮겨졌지만 그의 이름 만큼은 '홍랑길'로나마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때는 정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777년.

과거에 갓 합격한 26살의 젊은 선비였던 조정철은 정유역변(정조 시해 미수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제주로 유배됐다.

그가 제주목 관아 앞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만난 20살의 여인이 바로 홍윤애다.

당시 조정철은 지역 관리들의 핍박과 감시로 유배인들 중에서도 상당히 힘든 유배생활을 하기로 유명했는데, 홍윤애는 그런 조정철을 물심양면으로 시중을 들며 기구한 사랑을 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딸 하나까지 낳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이들에게 시련이 닥친 건 1781년 조정철 집안의 숙적인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잡아다 매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돌보던 홍윤애까지 끌고가 조정철의 죄를 추궁하며 정적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수십대의 곤장질에 몸이 부서져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조정철과 딸을 구하기 위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혀 정조는 어사를 파견해 진상조사에 나섰고, 결국 김시구는 제주목사에서 파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조정철은 정의현, 추자도 등으로 옮겨지며 고독한 유배생활을 이어 나갔다. 제주에서 흘려보낸 세월만 무려 27년이다.

왕권이 바뀌고 나서야 관직을 되찾게 된 조정철은 1811년 60살의 나이로 제주목사에 자원해 다시 제주 땅을 밟았다.

제주에 오자마자 그는 홍윤애의 묘를 찾아가 비석을 만들고 '의녀(義女)'라고 존칭하며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쓴 유일한 이 비문은 오늘날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다음은 홍윤애의 비문.

瘞玉埋香奄幾年 구슬 향기 묻힌 지 몇 년이나 지났는가
誰將爾怨訴蒼天 누가 그대 원통함을 하늘에다 호소할까
黃泉路邃歸何賴 아득한 황천길 돌아가 누구를 의지하나
碧血藏深死亦綠 깊이 감춰진 푸른 옥, 죽으면 또한 인연으로 맺어질까

千古芳名蘅杜烈 영원한 세월에 아름다운 이름 족두리풀처럼 강렬하고
一門高節弟兄賢 한 집안에서 난 높은 정절은 아우 언니가 뛰어났으니
烏頭雙闕今難作 정려를 지금 세우기 어렵지만
靑草應生馬鬣前 푸른 풀은 무덤에 자라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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