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앞에서 경찰이 시위에 나선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 관계자들을 에워싸고 있다.(제주도사진기자회 제공)

(서울=뉴스1) 박동해 박혜연 박상휘 이정후 기자 = 지난 3일 오전 '서북청년단'(서청)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극우단체 회원이 승압차를 타고 제주 4·3 추념식이 개최되는 제주4·3평화공원에 나타났다. 이들은 추념식 행사를 앞두고 '4·3사건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 방해 목적으로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운 집회를 벌일 계획이었다.

이날 집회를 예고했던 서청은 해방 이후 북한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남측으로 이주한 이들이 주축으로 구성한 반공(反共) 성향의 청년단체 '서북청년단'을 재건한다며 설립된 단체다.

원조 서청은 정부수립 전후, 한국전쟁 기간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폭행, 살인, 고문 등의 폭력적 행위를 벌인 집단이었다. 특히 서청의 테러 활동은 4·3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4·3사건 당시 이뤄진 서청의 잔인한 진압 활동은 제주도민들에게 치유되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

이날 서청 회원들은 추념식 참석자들과 제주 내 시민단체에 의해 저지당해 물러났지만 4·3 유족들은 추념일을 전후로 벌어진 이념 전쟁으로 또다시 상처를 입게 됐다.

'4·3 희생자 추념일'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이 화해와 상생을 다짐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적한 법적 기념일이다. 하지만 일부 보수성향의 단체들이 4·3사건을 북한과 결부 짓는 색깔론을 펼치면서 도민들은 분노했다.

고희범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서청의 집회 계획에 대해 "국가추념일에 추모행사장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것은 영령들에 대한 모욕이고 제주도민에 대한 모욕"이라며 "상가집 앞에서 잔치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지난 3월23일 오후 제주시 오라이동 거리에 보수정당 등이 설치한 '제주4·3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라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이 찢겨 있다. 2023.3.23/뉴스1 ⓒ News1 오현지 기자

◇ '김일성 지시' 등 외부개입설의 확대 재생산
서청이 3일 집회를 계획한 배경에는 지난 3월말 벌어진 '현수막 사건'이 있다. 우리공화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4개 정당과 자유논객연합은 지난 3월말 제주 전역에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해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내용을 담은 현수막 80여개를 내걸었다.

이들의 주장처럼 과거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소련이나 북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일으킨 ‘공산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1999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통과되고 정부 차원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졌다.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가 작성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4·3정부보고서)는 4·3사건을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 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 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1947년 3·1절 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행위로 생긴 갈등 이후 대규모 총파업과 대대적인 검거·제압 작전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불만이 쌓이던 와중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고 봤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이나 남로당 중앙당 등의 외부 개입은 없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외부 개입설'은 1974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이란 글에서 기원한다. 이글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씨가 게재했으며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자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그의 글은 이후 보수적 성향의 단체, 개인들에게 인용되면서 '4·3 사건은 북한의 지시로 발생했다'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하지만 이후 박씨는 해당 주장에 대해 "내가 쓴 것은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4·3은 서청(서북청년단)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이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번복했다.

관련 연구와 사건 관여자들의 증언에서도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는 외부의 지시가 아닌 일부 지도부들의 선동에 의한 자체적인 활동이었다는 근거들이 제시됐다. 또 4·3사건과 연계된 여순사건을 진압했던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 행동이었다"고 적었다.

4·3추념일을 앞두고 보수단체의 현수막이 대대적으로 게시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현수막을 게시한 자유논객연합의 김동일 회장은 "'김일성이 지시했다, 관여했다'는 것은 팩트"라며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 시작이 '공산폭동'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회장은 현수막을 게시하게 된 계기가 지난 2월에 있었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에 있다고 설명했다. 태 의원은 2월13일 제주합동연설회를 방문한 뒤 '제주 4·3사건, 명백히 북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해 논란이 일었다.

논란 이후에도 태 의원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김일성 지시설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정부의 4·3사건 보고서 내용과 대치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결국 정치권에서 발화된 색깔론이 극우단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 화해와 화합의 정신 깨는 '레드콤플렉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 (공동취재) /뉴스1 ⓒ News1 허경 기자

4·3사건 관련 유족들과 기념단체들도 사건의 발단에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무장대에 의해 다수의 죄 없는 민간인이 희생됐고 이를 기억하고 추념하자는 것이 4·3추념일의 의의다.

제주도민들은 끊임없이 진실 규명을 통한 '화해와 치유'를 원해왔고 화합을 위한 노력도 해왔다. 한 예로 지난 2013년 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재향경우회는 '화해와 상생을 위한 공동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유족회는 4·3 군경 전사자가 안장된 충혼묘지를 찾았고 경우회는 4·3위령제에 참석해 서로의 상처를 위로했다. 당시 두 단체의 공동결의에는 "우리는 이념적인 생각을 버리고 조건 없는 화해와 상생으로 도민화합에 앞장서며 지난 세월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4·3사건 유족들은 현수막 사건 등으로 빚어진 현재의 사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4·3사건을 이용하려는 의도'라고 꼬집는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은 "4·3 추념식만 다가오면 이념적으로 유족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여서 어떤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하는 정치적 술수"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4·3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화해와 화합의 정신을 유지·계승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4·3추념식이 열렸던 3일 윤석열 대통령은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해외 순방 준비'가 이유였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으면서 여당인 국민의힘 지도부도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4·3은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라는 과거 주장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윤 대통령은 3일 추념식을 맞아 발표한 추념사에서 "정부는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생존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고 보듬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동해·박혜연·이정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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