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만나봣수다]는 우리의 이웃, 가족, 친구의 이야기를 뉴스1 제주본부가 찾아가 들어보는 미니 인터뷰입니다. 유명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그 누구든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만나봣수다는 '만나봤습니다'의 제주어입니다.

제주해경 고광식 경감이 버려진 페인트를 사용해 만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예전에는 크레파스가 닳아서 손으로 잡지 못할 때까지 썼는데 요새는 멀쩡한데도 버려지는 게 너무 많아요"

지난달 28일 제주시 문예회관 제3전시실에서 제주해경 고광식 경감(6월30일 명퇴)을 만났다.

전시실은 보통 '썰렁'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적잖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 경감은 "저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는게 좋았을 뿐"이라며 "제대로 그림을 배워본적이 없어서인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나만의 개성을 더 살아있는 작품을 만드려고 노력했다" 말했다.

그에게 해양경찰은 '직업'이고 '사명'이지만 '그림'은 '운명'이었다.

고 경감은 "그림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좋았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에는 화가나 디자이너 등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고민도 했다"고 말했다.

고 경감은 "농부였던 아버지가 손재주가 있어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런 모습을 등 너머에서 배웠고 어른이 돼서 보니 아버지를 따라하고 있더라"고 설명했다.

고광식 경감이 동백꽃을 소재로 그린 작품. 그림을 그린 캔버스와 작품을 걸어놓은 철망걸이 모두 버려진 것을 재사용했다.

고 경감은 1989년 순경 공채로 해양경찰에 입직해 통영해양경찰서와 인천해양경찰서 등에서 근무하다 2003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홍보실장, 525함장, 129정장 등 여러 보직을 두루 거쳤다.

해경에 헌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림'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전공은 어로학과였지만 그림동아리에 가입했다. 통영해경에 근무할 적에는 지역작가들과 작품 전시를 했고 제주에 온 뒤에도 '제주그림책연구회'에 소속돼 20년 가까이 활동했다.

제주그림책연구회는 2003년 창립해 원화 전시와 그림책학교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연구회가 발간한 그림책만 28권에 달한다.

개인 작품활동도 꾸준히 이어온 끝에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주제로 6월말 첫 개인 작품전을 열었다.

고 경감은 유화, 아크릴화, 크레파스화, 레진아트화, 페인트화, 혼합재료화, 서각 등 6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 거린 작품 상당수는 해안가 등에서 고 경감이 직접 주은 폐기물을 주재료로 썼다.

해경 함정을 칠하다 남은 페인트와 붓을 모아 작품을 만들고 쓰레기통에서 주운 물감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는 누군가 그렸던 것을 재활용하거나 버려진 나무 판자와 합판을 썼다. 공사장에서 남은 합판 위에 그린 한 작품에는 휘어진 쇠못이 그대로 남아있다.

작품을 담은 액자 역시 일부는 쓰레기더미에서 찾았다.

고광식 경감이 환경보호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벽시계를 재활용한 액자 안에 낚시그물 등에 얽혀죽은 바닷새의 사체 일부가 담겼다.

그 가운데에서도 벽시계를 액자로 재활용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액자 안에는 낚시바늘과 낚싯줄, 그물 등이 채워져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닷새의 사체 일부가 얽혀있었다.

고 경감은 "해안가를 걷다가 그물에 걸려서 죽은 바닷새를 발견하고 환경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직업이 해경인만큼 바다와의 인연은 땔래야땔수가 없다. 그의 작품 상당수의 소재가 바다인 이유이기도 하다. 10년 전에는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을 펴냈을 정도다.

고광식 경감의 그림들. 한평생 해경에 몸담은 그의 작품에는 바다가 배경인 것들이 많다

예술가 기질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면 그의 절약정신은 어머니인 해녀를 닮았다.

고 경감은 어머니가 투병끝에 돌아가신 2020년 3월8일 어선 화재사고 현장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이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해녀의 아들인 고 경감은 해경이 돼 어머니가 평생을 바친 제주 바다를 누비며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한다.

33년10개월간 몸 담은 해경을 떠나는 고 경감은 함정에서 바라본 마라도 해상 풍경을 그린 '고요한 어느날 새벽'이라는 작품 설명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해양경찰에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게 됩니다. 1989년 7월8일 그날이 엊그제인데 어느덧 떠나야할 나이가 됐네요. 해상 생활은 거친 파도와 사건 사고와도 싸워야 하는 힘들었던 일들도 많았지만 생명을 구하고 대한민국 영토와 제주 바다를 지킨다는 보람도 많았습니다. 고요한 어느날 새벽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날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그 날이 그리워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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